중국사 100장면 - 82. 소련, 공산당과 손잡다 

 제 1차 국공합작(1924년) 

 

 

5, 4 운동이후에도 여전히 군벌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제국주의 외국세력은 중국인들의 삶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혁명세력들이 1920년대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 이 반민족적인 군벌과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혁명세력들은 원세개가 죽은 후 1927년 서남 군벌들과 손잡고 광동군정부를 수립했으나, 광동 군정부의 주력부대인 서남군벌이 연합지도 체제를 형성하자 손문은 광동 군정부의 대원수직을 사임하고 상해에서 은거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5, 4 운동이 일어났다. 5, 4 운동은 중국혁명세력들이 노동자 농민, 즉 민중의 힘을 다시 평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손문은 당시 군벌들이 서로 싸우는 틈을 타 다시 광동으로 가서 제 2 광동 군정부를 수립했다. 혁명세력은 광동을 혁명의 근거지로 삼아 북쪽의 군벌을 타도하고 중국을 하나의 정치체제로 통일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광동 군정부의 실질적인 군사력은 여전히 서남지방의 군벌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손문은 군벌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한 여러 가능성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혁명에 성공한 소련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소련은 다른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었다. 손문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가 소련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호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나는 북경정부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누구와도 손을 잡겠다. 우리는 미국, 프랑스, 영국 그밖의 모든 나라로부터 원조에는 희망을 잃었다. 우리 광동정부에 원조를 하고자 하는 나라는 소련밖에 없다"

 

손문은 중국혁명에 소련의 도움을 받고 싶어했다. 그런 그의 앞에 러시아 사회주의 이론가인 보이틴스키가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고 나타났다.

 

1922년 다시 러시아에서는 소련정부의 특별전권대사인 요페를 파견했다.그리하여 마침내 손문-요페 선언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그 내용은 중국에서는 공산주의를 실현시킬 수 없다는 점을 소련에게 납득시켰으며, 소련의 국민당에 대한 원조는 민국의 통일과 국가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소련과 손을 잡는 것은 중국 내의 공산당과 손을 잡는 것을 의미했다. 공산당은 1921년 창당한 후 1922년에는 국제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에 가입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소련의 지도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국민당과의 연합결성은 곧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과 연합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문제는 연합하는 방식이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의 하나는 공산당의 핵심간부가 개인자격으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손문에게는 공산당원이라고 할지라도 국민당의 강령과 규칙에 찬성하는 자이면 같은 편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문제는 공산당 내부에서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으나 어렵사리 통과되었다. 그 결정에 따라 진독수, 이대교등이 국민당에 가입하게 된다. 


소련과의 연합을 확정한 손문은 그동안 손을 잡았던 일부 군벌세력과 결별하고 상해로 돌아와 1923년 중국국민당 선언을 발표, 국민당의 체질을 개선시키기 위한 개진을 전개했다.

 

그 개진 때 발표된 선언문은 교육, 선거제도, 기본권 보장등과 아울러 사회경제의  균등발전, 즉 빈부격차 해소 등을 담고 있다. 경제적인 평등의 구체적인 방법은 토지의 소유한도 제정, 토지의 국가에 의한 수매, 중요산업의 국유화, 농촌조직의 개량을 통한 농촌사회의 평등, 남녀평등이었다. 


1924년 1월 국민당, 공산당, 코민테른의 합의에 의해 광주에서 국민당 제1회 전국대표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국민당이 조직을 바꾸어 공산당을 받아들여 제 1차 국공합작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이 대회에서 선출된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24명 중 3명이 공산당원이었다. 나중에 중국공산당을 이끌게 되는 모택동은 이때는 아직 공산당의 주도적인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16명의 후보위원 명단에 들어 있었다. 


국공합작은 손문의 삼민주의를 기본으로 하여 제국주의와 군벌의 타도, 농민과 노동자의 해방을 위한 이른바 연소용공, 부조농공(소련 및 공산당과 손잡고 노동자, 농민을 지원한다)는 원칙이었다. 국공합작 후 광동의 국민당 정부는반제, 반군벌의 혁명거점이 되었으며, 혁명군은 북상하여 군벌과의 싸움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활동은 1925년 3월 손문이 죽으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모든 반군벌세력을 끌어들여 중국혁명의 완수라는 대과제에 합류시킬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인 손문이 죽자 국민당 내의 반공세력들이 공산당을 배척하려는 움직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25년 11월 우파들은 북경 교외에 모여 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독자적으로 열어 공산당원의 국민당적 박탈 및 공산당 출신의 중앙위원 9명의 제명을 결의했다. 그러자 좌파들은 이 회의가 무효임을 선언하고 26년 1월에 국민당 2차 전체회의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공산당 출신의 진출이 더욱 두드러졌다. 이때 황포군관학교 교장이었던 장개석이 비로소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장개석의 실권은 이전부터 막강했고 또 체질적으로 반공적인 인물이었다. 장개석은 그해 5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당무 정리안을 내놓았다.

 

그 안은 첫째, 다른 당원이 국민당에 가입할 경우 그 당은 명단을 중앙집행위원회에 제출해야 한다. 둘째, 다른 당원으로 국민당의 고급기관을 간부를 맡게될 경우 전체의 1 / 3을 넘어서는 안된다. 셋째, 다른 당의 당원으로 국민당에 가입하는 자는 당 중앙기관의 부장이 될 수 없다.

 

이때의 다른 당이란 당연히 공산당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공산당은 결국 국민당 내에서 밀려났으며 제1차 국공합작은 이렇게 해서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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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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