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83. 혁명 근거지 정강산 - 홍군의 형성(1928년) 

 

 

1927년 제 1차 국공합작은 국민당 우파의 공산당 축출로 끝이 났다. 공산당은 이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에게 무장봉기를 통한 근거지 확보를 지령했다.

 

하룡, 섭정, 주덕 등 공산당 군 지도자들은 약 2만여 명의 홍군을 동원, 남창에서 봉기했다. 그들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남창을 점령하여 혁명위원회를 설치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건군 기념일은 이 남창봉기일인 8월 1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남창봉기에 의해 수립된 남창 혁명위원회는 얼마 가지 못했다. 국민당군이 남창을 압박해오자 혁명위원회는 남창을 버리고 광주로 내려갔다. 그러나 국민당군의 추적은 계속되었고, 이러한 무장봉기를 통한 해방구(소비에트) 건설 노선은 광동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927년 12월 섭검영이 지휘하는 부대 및 노동자 수천 명이 광주에서 무장봉기하여 광주노농민주정부, 즉 광주 코뮨을 수립했다.

 

그러나 공산당을 말살하려는 국민당군은 이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대로 포위공격하는 국민당 군대와 3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대부분은 죽음을 당하고 몇 명만이 간신히 탈출하여 또 다른 해방구인 해륙풍으로 피했다. 이 광주 코뮨과 해륙풍 소비에트에는 한국의 사회주의자 150여 명이 가담했다고 한다. 


무장봉기를 통해 도시 중심의 거점(소비에트)을 확보하려던 공산당의 전략과 코민테른의 지시는 결과적으로 잘못된 노선이었음이 드러났다. 당시 이 노선에 반대한 모택동의 노선은 농촌을 먼저 장악하여 도시를 포위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패한 군대를 끌고 정강산으로 들어갔다. 이 정강산이 바로 공산당의 최후거점이었다. 여기에서 홍군의 기본적인 조직이 짜여졌다. 


모택동은 자신이 이끌고 들어온 부대를 정리하여 노농혁명 제 1군 제 1사단 제 1연대로 이름붙였다. 부대 구성원들은 국민당의 소탕작전에서 살아남은 약간의 노동자들, 이 지역 출신의 젊은 광부, 철도원 및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뒤 주덕, 임표, 진의 등이 이끌고 들어온 부대를 재편성하여 홍군 제 4군(노농혁명 제 4군)이 창설되었다. 사령관은 주덕, 정치위원 모택동이었다. 약 5만 명 정도의 인원이었다. 그 후 28년 하건의 반란 이후 많은 부대들이 정강산으로 모였는데, 그 부대들을 중심으로 홍군 제 5군이 편성되었으며 팽덕회가 지휘했다. 


정강산은 몇 개의 부락이 있는 오지였고, 지역은 넓지만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지 않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자 의복, 식량 등이 매우 부족했다.

 

수수와 호박이 주식이었으며 추운 날씨에도 따뜻한 옷을 제대로 입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홍군은 혁명정신에 투철했다. 혁명을 위해서 홍군의 행동수칙이 정해진 것도 이곳에서였다. 


홍군에는 '3대 규율'과 '8대 주의'가 있었다. 먼저 '3대 규율'은 

  1. 모든 행동은 반드시 지휘에 따른다. 
  2. 인민으로부터 바늘 하나 실 한오라기라도 얻지 않는다.       
  3. 토호로부터 몰수한 것은 모두의 것으로 한다. 


다음 '8대 주의'는
  1. 가옥으로부터 떠날 때는 모든 문짝을 제 위치에 복귀시켜놓을 것.
  2. 잠자고 난 뒤의 멍석은 개어서 원래의 위치에 놓을 것.
  3. 인민들에게 공손할 것이며 가능한 한 모든 힘으로 그들을 도와줄 것.
  4. 빌린 물건은 모두 반납할 것.
  5. 손상된 물품은 고쳐서 원상회복시킬 것.
  6. 농민들과의 거래시에는 정직할 것.
  7. 물건을 살 때에는 반드시 대금을 지불할 것.
  8. 위생처리에 주의하며, 특히 화장실은 인민의 주거지로부터 안전거리를 유지할 것.


인민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가지 않게 해야한다는 규칙을 지키게 했다. 그런 홍군은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3가지 지침을 외우도록 했다. 
  1. 적과 대항해서는 죽음으로써 끝까지 투쟁할 것.
  2. 인민을 무장시킬 것.
  3. 토쟁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을 확보할 것.


이제 공산당은 정강산을 근거로 하여 주변지역인 호남, 강서, 광동 3개 성의 경계지역에 6개 현으로 구성된 소비에트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혁명근거지를 확대하기 위해 채택된 방법은 첫째, 무력투쟁의 방식이다. 이것은 이전까지의 투쟁이 군사력이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패했다는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둘째, 도시보다는 농촌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세력확대의 주대상을 농민으로 삼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지주들의 토지를 모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토지개혁이 중심적인 정책이 되었다.

 

그리고 지역별로 소비에트를 건설해야 하며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진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게 된다. 이 원칙은 이전의 실패에 대한 반성과 모택동의 판단에 주로 근거하고 있었다. 위에서 말했던 3대 규율과 8대 원칙은 바로 이러한 원칙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것들이었다. 


또한 홍군의 유력한 전투 방식은 유격전술이었다. 이것 역시 무기와 숫자 등 모든 면에서 약세인 조건에서 나온 전술이다. 유격전술의 원칙은 모택동에 의해 제시되었다. 
  1. 적이 전진하면 우리는 물러선다. 
  2. 적이 멈춰서면 우리는 적을 교란시킨다.
  3. 적이 전투를 피하면 우리는 공격한다. 
  4. 적이 물러서면 우리는 추격한다. 


그리고 이후의 세력 확대과정에서 이 원칙은 올바른 것이었음이 판명되었다. 1928년 겨울이 끝날 무렵 공산당은 혁명의 중심 혼군의 산실인 정강산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많은 군대를 먹여살릴 수 있는 군수물자를 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은 국민당군이 포위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들어오기도 힘들었다. 그들은 광동 근처에 새로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국민당 내부의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틈을 타 강서지역 외의 몇 개 지역에 소비에트를 수립했다. 1930년 여름에는 전국에 걸쳐 약 30여 개의 소비에트가 수립되었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전화카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