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71. 중국의 제도에 서양의 기술
양무운동의 추진(1860 ~ 1894년)
평등사회의 깃발을 내세운 태평천국 세력이 짧은 시간에 큰 세력을 형성하면서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은 19세기 말 중국농민들의 생활이 그만큼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양의 침략은 계속되었으며 청나라는 더 이상 중국을 온전히 통치할만한 힘이 없었다. 청조의 지배층 내에서는 권력다툼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태평천국이 전국을 휩 쓸 때도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을뿐 아니라, 외국세력의 압력에도 변변히 저항을 못하고 굴복했다.
이런 상황에서 청조 지배층 일부에서는 중국의 힘을 강화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서양의 근대 공업기술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것을 양무운동이라고 한다.
양무운동은 곧 서양의 문물을 힘써 배우자는 것으로, 마치 우리 나라의 개화운동과 비슷했다. 이 운동의 중심인물은 태평천국군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한 중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으로, 이들은 한족으로서의 청의 고위 관직에 있던 사람들이다.
청조의 지배층이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서양의 과학기술이었다. 청조가 서양과 대결할 때 우수한 서양무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던 뼈저린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윤리도덕이나 정치제도들은 중국전통을 계속 유지하면서 과학기술만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른바 '중체서용'이라는 말에 잘 표현되어 있다.
중국전통을 근본으로 하여 서양세력에 침략당해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지만 내심으로는 아직까지 그들의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를 볼 수 있다.
양무운동은 태평천국군 세력이 약화되고 있던 1860년대 초부터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1894년까지 계속된다. 양무운동을 담당했던 기관은 총리아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에서 실질적으로 힘을 가지고 태평천국의 난을 제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중국번과 이홍장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다.
양무운동은 보통 3단계로 구분한다. 제1단계는 1860~1872년까지의 시기로, 주로 군수공업 중심의 개혁이며, 제2단계는 1872~1885년까지로 무기와 아울러 조선관련 기업, 근대적인 운수 통신시설, 전신 부설 등이다.
제3기는 1885~1894년까지로 이홍장의 북양해군이 편성되고 장지동이 한양제철소를 건설하는 등 근대산업시설과 군사조직이 강화되었다.
제1단계는 청의 황제인 동치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함풍제가 외국세력을 피해 가 있었던 열하에서 1861년에 죽자 측근 신하들은 그의 다섯 살 난 아들을 황제에 올렸다. 이 사람이 동치제다. 그러자 동태후(함풍제의 정부인)와 동치제의 친어머니인 서태후가 쿠데타를 일으켜 함풍제의 측근들을 몰아내고 실권을 장악했다.
이때 지배층들에 의해 전개된 개혁운동은 주로 군사기술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개혁은 동치제 때 이루어진 것이라 하여 '동치중흥'이라고도 한다.
1862년 증국번이 '안경내군계소'라는 서양식 무기제조 공장을 건설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흥장이 '상해양포국', '강남제조총국' 등 무기공장을 만들었다. 이 공장들은 모두 관영으로 국가재정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이러한 근대적인 군수시설들은 그것을 주도했던 양무파들의 실권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했고, 특히 그중에서 두드러진 인물이 이홍장이었다. 그는 북양대신이라는 직책으로 양무운동을 주도, 상해에 무기제조 공장을 세워 무기와 탄약을 생산했으며, 군함을 만들기도 했다.
이홍장은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지휘 아래 있던 해군의 전력강화를 꾀했고, 1888년 북양해군을 만들었다. 그뒤 양무파의 또 다른 실력자였던 좌종당은 남양해군을 창설했다.
이들 양무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국내의 정치, 경제제도 등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목표는 근대기술을 도입하여 전통적인 중국사회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들은 태평천국군과 싸울 때는 외세에 의존하기도 했다. 이홍장의 외국들에 대한 정책은 타협과 양보였다.
그러나 군대의 전력강화와 산업의 성장으로 나라를 부강하고 안정되게 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계기가 닥쳐왔다.
그것이 바로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일본과 싸웠던 청일전쟁(1894)이다. 청나라는 군사력을 강화시키면서 가상적국으로 일본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일본과의 싸움이 시작되자 그동안 많은 노력을 들여 육성했던 이홍장의 북양함대가 일본해군에게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은 이홍장의 양무운동이 별다른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다. 그전에 좌종당의 남양해군도 인도차이나 반도로 침투하는 프랑스와 맞서 싸운 청, 프전쟁에서 패한 바 있었다.
양무운동 과정에서 서양 여러 나라는 양무파들이 운영하는 공장에 기술자를 파견하고 기계를 수출했으며, 차관을 주어 경제적으로 그들의 지배 아래 두었다.
아울러 서구열강은 중국 내륙 깊숙이 들어가 상품을 팔고 원료와 농산물을 사들이게 되어, 중국은 서양의 완전한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주권을 서양세력에 뺏긴 반신민지 상태에 떨어지게 되었다.
실용적인 서구의 과학기술 도입을 통한 중국의 근대화 노력은 주권을 강화시키지도 못했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도 성공하지 못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