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67. 사실에 바탕하여 진리를 탐구한다

 고증학의 발달(18세기~19세기 전반) 

 

 

중국의 각 시대에는 그 시대의 사회변동과 상황에 맞는 사상들이 발달했다. 춘추전국시대에 여러 사상이 나왔으며, 진시황 대의 분서갱유를 거쳐 한 대에 이르면 유학이 가장 중요한 학문으로 자리잡는다. 따라서 학문은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해 대부분의 유교경전의 내용이 소멸되어버렸기 때문에 한나라에 들어오면 잊혀지고 사라진 유교경전에 관한 내용과 그 뜻을 밝혀내는 학문이 발달하는데 이것을 훈고학이라고 한다.

 

훈고학은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정확하게 밝혀 원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학문이다. 이 훈고학적 전통은 당나라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송나라에 들어오면 단순히 유교경전의 글자 해석이나 의미를 파악하는 데 머물지 않고, 경전이 담고 있는 전체적인 철학적 의미를 밝히는 데 관심이 집중된다.

 

그때 나온 사상이 성리학이고, 그 성리학의 세계관에 반대하여 명나라 때 나온 것이 양명학이다. 성리학이나 양명학은 인단과 세계, 자연의 이치를 보는 철학적 관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명나라 말기에 이르면 그와 같은 철학적 논의가 일상생활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특히 청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평생 학문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고염무 등이다.


이들은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게 되면 처벌받기 때문에 정치에 관계하지 않고 학문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또한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도 쉽게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주로 과거의 여러 자료들을 꼼꼼히 살펴 경전의 뜻을 더욱 정밀하게 해석한다거나 역사적 사실을 좀더 확실하게 밝히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혹은 일반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하는 경향도 있었다. 


특히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에 서양의 제주이트 교단 선교사들이 서양의 과학기술을 가지고 들어오게 되어 중국의 학문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성립하는 청대의 학문을 고증학이라고 한다. 고증학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진실을 구한다는 '실사구시'를 주장한다.


성리학이나 양명학과 같이 경전의 글자 하나 문장 하나에 얽매이지 않고 철학적인 측면으로 관실을 갖고 있었던 것에 비해 사실에 바탕을 두어 진실을 구한다는 고증학자들은 우선 경전연구에 있어서는 한나라에서 이루어졌던 훈고학 쪽에 가까운 것이다.

 

물론 훈고학으로 그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사실에 근거한다는 말과같이 객관적인 증거를 수집하여 진실을 밝히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전해내려오던 경전 하나하나를 다시 연구하여 어떤 것은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다른 사람이 위조한 것도 있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런 고증학적인 분위기는 역사학, 지리학의 발전을 가져오게 했으며, 특히 옛날의 비문이나 종 등에 새겨진 글을 판독해내는 금석학 같은 진실을 밝히는 매우 중요한 방법의 하나였다.


청대 고증학의 발달로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다. 특히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고전서>인데, 이것은 수만권에 이르는 책을 모아 분야별로 분류해서 정리한 대업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대적인 편찬사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청나라의 사상탄압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청나라는 소수의 만주족이 지배층이 되어 다수의 한족들을 통치해야 했기 때문에 강경책과 회유책을 교묘하게 동원해야 했다.

 

관직에 만주족과 한족을 같은 수로 임명한다든지 하는 것이 한족을 회유하는 하나의 예라고 하면, 한족의 민족주의적인 사상의 탄압, 변발의 강요, 만주족과 한족의 결혼금지 등은 만주족이 그들의 혈통을 잃지 않으면서 한족을 통치하기 위한 강경책에 해당한다. 그러한 강경책 중 하나가 바로 '문자의 옥'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족 지식인들이 청조를 비난하는 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그것을 어길 경우 강력한 처벌을 하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사상탄압을 받아 희생되었다.


전국의 서적을 모아 검토하여 편찬한 결과인 <사고전서>도 실은 그 책들의 내용을 검토하여 청조를 비난하는 책들을 가려내어 읽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한족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현실 정치적인 문제에 눈을 들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편찬사업에 동원하려고 했다는 주장도 있다.


결국 고증학은 성리학이나 양명학처럼 그 시대의 흐름을 방여하는 하나의 사상체계라기보다는 방법적인 측면의 성격이 강한 학문이었다.

 

물론 유교경전이나 고전을 새롭게 해석해내어 근대지향적인 사상을 찾아내려는 노력들도 행해져 성과를 거둔 부분도 있으나, 그 시대 전체를 주도할 만한 사상체계나 혹은 다가오는 근대세계를 맞아 사회의 핵심적인 사상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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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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