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16. 유교가 제국의 이념으로
중국문화라고 하면 제일 먼저 유교가 떠오른다. 유교는 한무제 때 국교로 채택된 이래, 역대왕조의 지배이념으로서 흔들림없는 지위를 누렸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국의 향촌 사회에도 깊숙이 뿌리를 내림으로써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진이 몰락하자 한 초기에는 다시 제자백가의 사상이 부흥했으며, 휴식의 정치에 힘입어 '무위자연'의 도가사상이 풍미했다. 진의 가혹한 법치, 그리고 오랜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무제 때에 이르러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완성되자 이에 적합한 통일된 사상체계가 요청되었다. 마침내 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오경박사, 국립대학이 태학을 설치했으며, 유교적 덕목에 의해 관리를 등용하는 효렴제를 개설함으로써, 유교국가의 기초를 마련했다.
기원전 136년 조정에 처음으로 설치된 오경박사는 오경 중에 1경씩을 전공했으며, 처음에 50명의 관선학생으로 출발한 태학의 졸업생은 후한 말에 이르면 3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효렴제에서 시작한 중국의 관리등용법은 유학자이자 정치인인 학자적 관료로서의 중국적 지신인을 배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며,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며,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공자는 일찍이 인간의 차별성을 전제로 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동중서는 이 도덕규범을 다음과 같이 치환했으니, 이것이 삼강이다.
"임금은 신하의 근본이며, 아버지는 아들의 근본이다. 남편은 부인의 근본이다."
동중서는 유가의 사상에서 인정하는 인간사회의 차별적인 질서가 하늘에 의해 경정된 것이라고 주장, 천하통일은 '하늘과 땅의 이치이며, 고금의 원리'이고, 군주는 '나라의 근본'으로 높이 추앙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군주와 신하는 본과 말, 즉 줄기와 가지의 관계라는 것이다. 유가의 사상에 종교성을 부어하고, 여기에 음양오행적인 천인론을 가미함으로써 마침내 군주권을 합리화시키는 데 성공한 동중서의 유교는 무제에게 커다란 환영을 받았다.
그렇다고 유교가 국교로 되면서 곧바로 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아니며, 무제가 반드시 유교로서만 통치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사기>나 <한서>의 흑리전에는 한무제 때의 법가적 관료에 의한, 이른바 '유혈 십리에 미치는' 주살이 거듭 기록되고 있다.
얼핏 법가와 유교는 서로 상충하는 사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유교이념을 표방한 중국의 역대왕조들 중에서 어떤 왕조도 법가적 통치를 포기한 적은 없다.
오히려 이 두 사상은 상호보완적으로 왕조의 지배력을 공고히 함으로써 중국의 전제왕조를 2천년간 지속시키는 역할을 했다. 유교는 군주의 전제권력을 합리화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설득에 의한 자발적인 복종'을 실현, 권력행사의 절약까지를 가져다주었다.
유교의 경전으로 사서오경이 있다. 사서란 <대학>, <중용>, <논어>, <맹자>를, 오경이란 <역경(주역)>, <서(상서)>, <시>, <예경>, <춘추>를 일컫는다.
처음에는 오경이 중심이었으나, 송대에 신유학 즉 성리학이 발생하면서 사서가 경전으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오경은 공자가 편찬하거나 저술했다고 전해지는데, <주역>은 고대의 64괘에 의한 점술서이며, <서경>은 노나라에 전해진 주공을 중심으로 한 기록이다.
<시경>은 은대 이래의 시 305편이 담겨져 있고, <예기>는 고대의 예에 관한 학설을 모아 기록한 것이다.
<춘추>는 공자가 정리한 노나라의 편년체 역사서로, 간단한 연대기적 기록 속에 깊은 뜻이 함축, 이에 대한 해설서인 공양전, 곡량전, 좌씨전, 이른바 춘추 3전을 낳았다.
사서 중 <대학>과 <중용>은 <예기>의 한 편에 불과했으나 점차 중요시되면서 이로부터 독립한 것으로, <대학>은 유교 교학의 강령들이 담겨져 있고, <중용>은 불교에 대항할 만한 유교경전 중에서는 가장 철학적인 책이다.
<논어>는 공자의 언행을 기록, 공자가 강조되면서 점차 유교 최상의 경전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맹자>는 말 그대로 맹자에 대한 기록인데, 맹자는 당 중기 한유에 의해 공자의 계승자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나라 이후 당대까지는 이른바 훈고학이 성행했다. 훈이란 경전에 서술된 말을 난해한 것은 쉽게, 옛날의 용어는 현대적으로 풀이 한 것이다. 즉, 언어를 연구하여 고전을 바르게 해석함으로써, 그 본래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훈고학의 발생에는 진시황의 분서사건도 한몫한 셈이다. 당태종의 명으로 공영달이 <오경정의>를 편찬, 여러 유파의 해석을 통일했는데, 과거제의 시행과 더불어 일종의 국정교과서로 채택, 유학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했다. 공영달은 공자의 32세 손이라고 했다.
송나라 때에 이르러 신유학, 즉 성리학이 발생했다. 성리학은 노장사상과 불교의 형이상학적인 면을 흡수, 훈고학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다.
이와 기의 개념을 중심축으로 우주와 인간의 생성을 설명하고, 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구체적 실천을 제시하고자 했다.
주자로 불리는 주희는 주돈이의 제자인 정호, 정이 형제의 사상을 계승, <사서집주>를 편찬함으로써 성리학을 완성했다. 그의 이름을 따서 성리학을 주자학, 혹은 정이 형제의 이름을 함께 따서 정주학이라고도 부른다.
신유학, 유학의 새로운 흐름으로 주자학과 쌍벽을 이루는 것이 양명학이다. 양명학이라는 이름은 왕수인의 호양명에서 유래하며, 명대에 유행했다.
왕수인도 처음에는 성리학에 심취했으나, 성즉리설을 비판, 심즉리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우리의 마음속에 우주만물의 이치가 내재하고 있으며, 마음의 양면은 앎과 실천이다.
그는 앎과 함계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 지행합일을 주장했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주관적이고, 실천은 이에 기초한 도덕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성리학과 함께 관념주의에 빠질 위험은 있었다.
고증학은 명말 청초에 일어나 청대에 성행했다. 창시자인 고염무, 황종희 등은 지나치게 관념적인 종래의 학풍을 비판, 과학적인 고증과 박학을 통한 실천으로 세상의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학문, 즉 실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 근대학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지나치게 고증에 치중, 실용화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청의 한족 회유책에 이용당한 경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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