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15.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아지고
우리가 흔히 진한제국으로 부르는 것처럼, 한나라는 진나라의 각종 제도를 거의 그대로 계승했던 대표적 고대제국이었다. 그러나 아직 정권이 안정되지 않았던 초기에는 폭압적인 진의 지배와의 차별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한 고조는 가혹한 법칙을 완화하고
안정된 농업생산을 장려하는 조처들을 발표하여 백성들에게 휴식을 주는 정권임을 강조했다. 특히, 아직 굳건한 힘을 지니고 있는 건국공신들의 반란을 없애기 위해 이른바 군국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군국제란 군현제와 봉건제가 절충된 것으로, 수도 장안을 중심으로 한지역과 서부 군사 요충지는 황제 직속의 군현으로 두고, 나머지 땅은 대표적 공신세력인 한신 등 7인의 왕과 소하 등 제후에게 분봉, 나누어 다스리게 한 것이다.
거기에는 진나라가 군현제를 통해 너무나 급격하게 중앙집권을 추진했기 때문에 단명에 그쳤다는 고조의 판단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왕조의 지배력이 안정권에 접어들자, 이성의 제후왕들은 모반을 꾀했다는 누명으로 하나씩 하나씩 제거되기 시작했다. 천하의 명장인 초왕 한신, 양왕 팽월, 회남왕 경포,,,
감쪽같이 고조의 덫에 걸려든 한신은 한탄하여 말하기를,
"세상사람들의 말이 맞았구나, 재빠른 토끼가 죽으면 날랜 사냥개는 삶아 없어지고, 높이 나는 새가 떨어지면 좋은 활은 구석에 처박히게 되며, 적국이 패하면 지모있는 신하는 필요없게 된다더니..."
그러나 그도 비참하게 예정된 죽음을 면할 길이 없었다. 기원전 195년 고조가 그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할 때에는 이미 거의 모든 제후왕들은 유씨 일족으로 대체되었다. 유언처럼(우씨가 아닌 자는 왕이 될 수 없다)라는 불문율이 남겨졌다.
그런데 동성의 제후왕들도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혈연관계도 소원해지고, 점차 자신의 영내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 중앙권력에 위협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군은 15개에 불과하고, 제후국은 30여 개에 달했으면, 큰 제후국은 군 5,6개를 합친 것 이상으로 거대했다.
마침내 무제의 아버지인 경제 때에 이르러, 제후국에 대한 압력이 시작되었다. 경제는 박사인 조조의 의견을 채용, 제후왕의 과실을 헤아려 영지를 삭감하는 등, 제후국의 축소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오,초 등 7개 제후국들이 연합하여 황실에 반기를 들었다. 이것이 이른바 오초 7국의 난. 기원전 154년의 일이었다.
오왕 유비는 황실의 원로였지만, 40년간 오나라를 다스리면서 오나라에 대한 강한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중앙정부에서 오나라 국부의 원천인 소금과 구리의 산지를 헌납하나는 명령이 떨어졌다.
거기에 경제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겹쳐 난을 주도하게 되었다. 경제가 태자 시절, 중앙에 입조하러 갔던 그의 아들이 경제와 함께 바둑을 두던 중, 경제가 던진 바둑판에 맞아 절명했던 것이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우리 제후왕들은 점점 가난해져서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앉아서 멸망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일어나서 살길을 도모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유비의 호소에 응해 초, 조 등 중국 동남부의 6국이 가세, 간신 조조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흉노 등 외세와의 동맹도 꾀하고 있었으며, 초반의 전세를 장악, 한나라는 건국 50년만에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다.
7국의 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해 조조가 참수되었으나 반군의 목적이 그것이었을리 없었다.
그런데 경제의 친동생 양왕이 반란군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하자, 반격의 실마리가 마련되었다. 진압군 총사령관이 주아보는 성문을 굳게 닫고 반란군의 어떠한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메아리 업는 전쟁에 지치고, 보급로가 차단된 반란군을 점점 굶주림에 쓰러져갔다. 마침내 오왕은 살해되고, 다른 제후왕들도 모두 살해되니 반란은 불과 3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오초 7국의 난을 끝으로, 한황실의 중앙권력에 도전할 지방세력은 없었다. 이제 제후국의 정치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에 의해 운영되었고, 제후왕은 국정에서 분리되기 시작했다.
한무제는 추은령을 실시하여 제후권의 발호에 마지막 쐐기를 박고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권력을 완성했다.
추은령이란 제후왕의 사망시, 적장자 이외의 아들에게도 토지를 나누어 주고, 이를 열후로 승격시켜 중앙정부의 관할하에 있는 군에 속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제후왕의 영지는 더욱 세분, 축소되게 마련이었다.
한무제는 기원전 141년 16세의 나이로 즉위, 기원전 87년 71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장장 54년간 중국을 통치하면서 고대제국의 가장 화려한 시기를 장식했다.
그것은 아마도 진시황이 꿈꾸었던 세계였을 것이다. 한무제는 진시황의 꿈을 현실정치에서 실현, 전제군주의 가장 대표적인 전형이 되었다.
무제 때는 오늘날 중국의 지도와 거의 비슷한 판도가 형성되었다. 그는 외정에도 힘써 오랜 숙원이 흉노 정벌에 총력을 기울여 커다란 타격을 입혔으며, 베트남을 정복하고, 위만조선을 멸망시켰다.
조선의 사람들은 1년간이나 왕검성을 지키기 위해 굳세게 항쟁했으나 끝내 멸망, 한4군이 설치되었다.
우리 나라로서는 최선진국이었던 고조선이 멸망함으로써 커다란 역사적 손실을 입었다. 후발국가인 고구려 등이 다시 강성해지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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