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14. 살아 있는 듯한 한나라의 여인
1972년의 어느 날,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은 세계인들의 눈이 뎅그렇게 커졌다. 도대체 과학 추리소설에서나 읽을 수 있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바로 눈앞의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2천년 전에 죽어 관 속에 묻혔던 여인의 시신이 전혀 부패하지 않은 채로 있었으며, 그녀의 팔을 손가락으로 누르자, 잠시 움푹해졌던 그녀의 피부는 천천히 원상태를 회복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듯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녀의 체내의 기관들은 세부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보존되어 있었으며 지문도 채취할 수 있었다.
자세히 분석해본 결과, 그녀의 나이는 50세 정도. 154.4CM의 키에 비만형이었고, 머리는 숱이 많지 않았으나 흰머리는 없었다. 그녀는 가발을 쓰고 있었다.
혈액형이 A형인 그녀는 병약한 체질이어서 선천적 담낭 기형에다 결핵을 앓은 적이 있었으며, 동맥경화에다 류머티즘가지 앓고 있었다.
그녀는 아마 담석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참외를 먹었는데, 두세 시간 후 심장에 발작을 일으켜 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식도에서 위장까지 138개의 참외씨가 발견되었다.
이 여인의 무덤을 옛 초나라 땅이었던 장사시 동쪽 교외에서 발굴되었다. 사람들은 그녀 일가의 무덤을 10세기 군소 정권의 하나였던 초나라 마은의 무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왕의 무덤, 즉 마왕퇴로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1972년 근처에 병원 신축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공구 하나가 무덤을 건드리게 되자 갑자기 무덤으로부터 청백색의 가스가 높이 분출되었다, 완전히 밀폐됨으로써 앞으로도 영원히 간직될 수 있었던 무덤은 이제 파괴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마치 2천년 전에 당 속에 묻어놓았던 완벽한 타임캡슐을 캐낸 것처럼 전한 시대 유력자의 화려한 생활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게 되었지만.
무덤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외부세계와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묘실을 땅을 파서 조성된 것이 아니라, 판축공법으로 땅 위 2배 정도의 높이로 쌓아올려 굳힌다음, 그 위로부터 파내려 가는 방법으로 조성되었다.
그녀의 시신은 20겹의 옷으로 싸여졌고, 4겹의 목관, 다시 곽에 넣어졌다. 모든 것에 당대 최고의 장인의 솜씨가 발휘되었다. 양질의 목재가 엄선되어 휘거나 갈라지지 않았으며, 이음새는 못의 사용 없이 요철로써 처리되었는데 조금치의 틈새도 없었다.
관곽은 옻칠로써 마감되었고, 곽은 총중량 5톤 가량 되는 두터운 목탄층으로 둘러싸인 후, 다시 백토로 채워지고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이 공기나 습기, 지하수로부터 시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사체뿐만 아니라, 비단, 칠기, 도기 등과 함께 곡물과 식품까지도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는데, 특히 귀중한 것은 관 위에 덮여 있던 비단,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위에 그려진 그림(백화)이다.
이 그림은 중국 회화사에서 크게 주목되는 작품으로, 약 2N의 길이를 3분해서 천상과 인간계, 지하의 세계를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중단에 그려진 노부인이 바로 이 무덤의 주인공이다.
마왕퇴의 무덤은 그녀와 그녀의 남편 이창, 그리고 젊은 나이에 요절한 그녀의 아들의 무덤이었다. 이창은 전한의 제후국이었던 장사국의 재상이었으며, 기원전 186년에 죽었다. 무덤의 구조로 볼 때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창의 무덤은 이미 도굴된 상태였고, 그 아들의 무덤은 부인처럼 완정히 보존되지는 못했으나 역시 귀중한 유물을 남겼다.
4편의 백화와 함께 비단에 씌어진 책들, 즉 백서가 발굴되었던 것이다. 백화에는 마차, 배, 가옥 등 당시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그림도 있고, 합기도의 여러 동작들도 그려져 있었다.
백서는 <전국책>, <노자>, <춘추> 등의 희귀본과 <상마경>, <내공> 등의 유실된 책들이다.
중국 최고의 지도도 발굴되었다. 악기와 무기도 부장되었으니, 30세쯤에 요절한 무덤의 주인공은 아마도 문무를 겸비한 호걸이었던 것 같은데, 그의 신분이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한나라는 관혼상제가 사치의 극을 달렸던 시대였다. <한서>에는 태수의 현직에 있던 원섭이라는 자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향전이 1천만 전 이상 부조되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산업을 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업을 정했다' 함은 요즘말로 치면 기업을 차렸다는 정도의 의미였을 것이다. 한나라에도 생산력의 발전은 꾸준히 거듭되었으나, 그 결실은 소수층에 독점되었다.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지배층이 한 대에 등장하고 있었다.
한 대의 무덤을 논하면서 중산왕 유승 부부의 무덤을 빼놓을 수는 없다. 1968년 훈련중이던 인민해방군의 한 병사가 발굴했는데, 암산의 낭떠러지에 파들어간 횡혈식 묘이다. 유승은 경제의 아들이자 무제의 의붓형이었다.
<사기>에 의하면, 그는 술을 즐기고 색을 좋아해 아들이 12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의 방종함은 제후왕들을 죄어오는 무제의 의구심을 피하기 위한 자구책이라는 면도 있었을 것이다.
유승의 무덤은 마왕퇴와는 달리 금, 은, 동, 철기 등 다양한 금속제 유물이 부장되었는데, 특히 우리의 시선을 그는 것은 이른바 '금루옥의'의 완벽한 발굴이다.
이 옥으로 된 수의는 2천 조각 남짓한 네모난 옥편의 네 귀퉁이에 구멍을 내고 이를 황금실로 엮어 만든 것이다. 이 옷 한 벌을 공인 1사람이 만든다면 10년의 세월이 걸린다고 한다. 또 그의 옥은 멀리 사막을 넘어 신강성에서 가져온, 그 유명한 '곤륜의 옥'이었다.
중국인들은 옥을 영적인 힘이 있는 고귀함의 상징으로 생각해왔다. 천자의 말을 옥음이라 하고, 천자의 인장을 옥쇄라고 한다. 죽은 사람의 입에 옥을 물리면 영적인 세계에 부활하고 시신이 부패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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