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11 진시황,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이륙할 때, 가장 마지막까지 육안으로 확인되는 인류의 건조물은 만리장성이라고 한다. 사람들에게 중국을 상징하는 문화물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슴없이 만리장성을 꼽을 것이다.
오늘날 북경 교외의 팔달령으로 오르는 장성은 관광의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곳 장성의 입구에는 (장성에 올라보지 못한 사람을 어찌 사나이라 하리)라고 씌어진 모택동의 글귀가 걸려 있다.
이곳에서 성에 이르는 계단을 약 40분 오르면, 해발 1,015m의 정상에 다다른다. 그 정상에서 발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준령의 물결을 바라본 사람들은 그 장려함을 잊지 못한다고 하는데, 현재의 장성은 대부분 명나라 때에 축조된 것이다.
본래 장성은 토성이었으며,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소 위치가 변하기도 하고 보수, 확장이 거듭 되었으니, 그 총연장을 합치면, 아마도 지구를 몇 바퀴 돌고도 남을 것이다.
본래 만리 장성은 진시황 때 이 무렵 중국 북방을 위협하던 흉노족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이다. 흉노는 아시아 최초로 기마술을 터득한 유목민족으로, 놀라운 기동력으로써 중국의 북방을 위협하고 있었다.
장성은 서쪽의 감숙 성 임조에서 시작, 황하 북쪽을 휘돌고, 음산을 따라 조나라와 연나라 때 이미 축조되었던 성벽을 연결, 동쪽으로 요령성 양평에 이르는 것으로 현재의 것보다 훨씬 북방에 이어져 있었다.
비록 기존에 있던 성벽을 연결한 부분이 있었다 하더라도 참으로 엄청난 대역사였다. 성벽은 단순히 높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넓이도 대단해서 성벽 위로 5필 정도의 말이나, 10열의 병사가 동시에 보행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우리가 만리장성을 중국통일의 상징물로, 또 진시황이라는 전제군주의 위대한 권력의 화신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찌됐든 만리장성의 완성으로 진시황의 중국통일의 과업은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이다. 만리장성은 중국적 세계를 북방의 유목민족과 구별하는 북방한계선이 되었고, 만리장성 이남으로 표현되는 중국의 영역은 오늘날까지도 큰 변화가 없다. 로마자 표기법에 따른 중국의 명칭이 진에서 유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진시황-그의 이름은 정, 기원전 259년 장양왕 자초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2살, 정치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머니 태후와 여불위에게 맡겨졌다.
여불위는 대상인 출신으로 일찍이 정치적 야망을 품고 조나라에 인질로 있던 자초에 접근, 곤궁한 처지에 있던 그의 후원자가 되었으며, 마침내 공작을 통해 그를 즉위시켰다.
그는 자초가 자신의 애첩에게 마음을 빼앗기자 그녀마저도 자초에게 내주었는데, 그녀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고한다. 그 아이가 바로 진왕 정. 그렇다면 여불위는 진시황의 실부가 되는 셈이다.
그가 학자나 변론가 3천 명을 빈객으로 우대하고, (여씨춘추)라는 일종의 대백과전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하니 그의 재력과 권세는 가히 천하를 호령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왕 정은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기원전 238년 성인 의식을 치르고 친정에 들어가자, 냉철하고 과단성있는 정책을 펼쳐나갔다. 상인 출신이었던 여불위의 중상책은 다시 억제되고, 상앙 이래의 전통적 개혁정책이 강행되었다.
낙양에 연금되었던 여불위는 마침내 전도를 비관하여 독약을 먹고 자살했고, 재상으로 등용된 이사는 강력한 법치로써 통일을 추진하였다. 진시황은 하루에 30kg의 서류를 처리하지 않고서는 결코 휴식을 취하지 않았다고한다.
39살의 나이에 천하에 군림하는 유일한 왕이 된 그는 자신의 명칭이 종래 6국 군주와는 차별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는 '왕'이 아니라 '황제'라고 불리는 최초의 인물이 되었으니, 바로 시황제이다.
황은 빛나고 빛난다는 의미의 형용사이고, 제란 자연계와 인간계를 지배하는 최고신을 의미한다. 이제 군주는 '하늘의 아들', 혹은'천명을 받은 자'정도가 아니라, '절대신' 그 자체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가히 전제군주의 출현에 걸맞은 칭호라 할 것이다.
전제군주 시황제의 명령은 군현제를 통해 지방의 말단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황제라는 칭호가 허황한 이름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간접통치 방식인 봉건제는 폐지되고, 군현제가 전국에 걸쳐 시행되었다. 전국은 36개의 군으로 나뉘고, 군 밑엔 현, 향, 정, 리를 두었다. 지방의 행정 책임자는 독자적 세력을 가진 지방의 토착세력이 아니라, 중앙에서 황제의 대행자로 파견되어 황제의 신임에 절대 의존하는 충성스러운 관료로 대체 되었다.
이제 황제는 백성들을 직접 지배하게 되었으며, 최초로 중국 전역은 중앙집권적인 하나의 통치체제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수도 함양으로부터 지방 각지로 뻗어나가는 방사선의 도로망이 정비, 황제의 명령이 전파되었고, 반란군이 발생되었을 때는 신속한 지압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도로건설의 과정에서 반란군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성벽이나 진지 등에 제거되었다. 전국의 토착부호 12만 호가 강제로 수도에 이주당했으며, 민간 소유의 무기들은 모두 몰수되었다.
진시황은 전국을 5차례에 걸쳐 순행하고, 태산 등 명산에 올라 거대한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자신의 위엄을 과시했다.
통일국가 속에서 문자, 도량형, 화폐등도 통일되어 사회발전에 기여했다. 그런데 진시황을 폭군적 이미지로 굳히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분서갱유로 일컬어지는 사상통일책이었다.
강력한 무력과 엄격한 법으로 통일은 일단 성취되었으나, 이미 춘추 이래 발달한 각 지역의 독자적 문물과 창의 적인 생각, 비판적 언론이 문제가 되었다. 진시황은 제국의 장기적인 지배를 위해 사람들의 생각까지도 통일하기를 바랬다.
민간인들에게는 당시의 지배이념인 법가 사상서와 실용서적들을 제외한 어떠한 책의 소지도 금지되었으며, 관리가 아닌 사람의 자유로운 학술토론도 금지되었다.
전국에 있는 수많은 서적들이 금서로 취급되어 관에 수거되고 잿더미로 화했다. 옛 서적에 대해 논의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고, 옛것을 찬미하고 진을 비방하는 자는 일족을 멸한다는 법령이 반포되었다.
이듬해에는 이에 비판적인 유생 460여 명이 생매장당하는, 이른바 갱유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말렸던 그의 장자 부소도 멀리 변방으로 쫓겨났다.
이 사건은 독재적 국가권력에 의해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억압되었던 최초의 선례로, 세계적 언론탄압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알쓸신잡 > 중국사 100장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사 100장면 - 15.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아지고 (0) | 2020.12.25 |
---|---|
중국사 100장면 - 14. 살아 있는 듯한 한나라의 여인 (마왕퇴) (0) | 2020.12.24 |
중국사 100장면 - 13. 항우와 유방의 대결 (0) | 2020.12.23 |
중국사 100장면 - 12. 여산릉 병마용 허수아비의 노래 (0) | 2020.12.19 |
중국사 100장면 - 10. 후진국 진의 대약진 (0) | 2020.12.16 |
중국사 100장면 - 9. 백가가 쟁명하다 (0) | 2020.12.15 |
중국사 100장면 - 8. 철기의 확산과 군사기술의 변혁 (0) | 2020.12.11 |
중국사 100장면 - 7. 춘추 5패, 열국의 각축전 (0) | 2020.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