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9. 백가가 쟁명하다



인류의 정신사를 더듬어볼 때, 인류의 자유로운 정신활동이 최초, 최고로 고양되었던 시기는 아마도 기원전 6~5세기, 각국이 고대제국으로 나아가는 대변혁기를 꼽아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 석가, 공자 등 동서양의 위대한 철인들은 모두 이시기에 활약했다.


이 시기에 인류는 비로소 자연으로부터 독립, 자아를 확립해나갈 수 있었다. 생산력의 비약적 발달은 분업을 촉진, 생산에서 자유로워진 전문적 지식인을 배출했으며, 이들은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대가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 우리가 산업화 이후 전통적 가치가 무너지고 혼란 속에서 새로운 가치관의 수립에 골몰했던 것처럼, 당시의 중국도 제22의 농업혁명 이래, 씨족 공동체적 질서에 기반한 주의 봉건제도와 예교문화가 이미 중심적 위치를 상실한 상태에서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을 위해 치열한 탐색의 과정을 겪고 있었다. 


거기에 저마다 통일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각국 군주의 경쟁은 사상의 발달을 더욱 촉진, 그 결과 중국 사상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대를 열었다. 



흔히 춘추전국 시대를 사상의 황금시대, 이름하여 '제자백가' 시대로 부르는데, '자'는 교사를 존대하여 부르는 명칭이고, '가'는 직접적으로는 저술가, 확대해서 사상의 한 흐름을 이룬 학파를 일컫는다.


춘추 말기에 최초의 교사로 등장한 공자는 주대의 봉건적 질서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던 반면, 전국 초기의 묵자는 반전론을 주장하면서 만인 평등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혁신적인 철학을 개창했다. 


한편 허무주의자요 문명비판론자인 노자는 모든 인위적인 노력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고, 그러므로 자연으로 돌아가 순리에 맡기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사상은 각기 뛰어난 제자들에게 이어져 후대에 계승, 중국사사의 원천이 되었으나, 실제로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지향하던 당시의 군주들에게 채택, 구현되었던 사상은 역기 법가의 사상이었다.


유가의 시조인 공자의 이름은 공구, 그의 신분은 명확치 않으나 아마도 귀족 중에 다소 낮은 신분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주왕실의 전통일 강했던 노나라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제사 용기를 갖고 놀았다고 하는데, 일찍이 고아가 되어 독학으로 학문을 성취했다. 


그는 세상의 어지러움은 전통의 예문화가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 그가 가장 존경해 마지 않았던 주공과 같은 성인 군주가 출현, 이 난세를 수습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는 실제로 어진 정치를 펼칠 군주를 찾아 14년간 전국을 주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에서 후세를 교육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유교의 경전이 된 (오경)은, 말하자면 그가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만든 교과서를 기초로 뒷날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제자는 모두 3천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학업을 익힌 후 관리로 등용되기를 바라는 평민들이 많은 수를 차지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인'과'예'. 인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예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은 이러한 덕목이 가장 순수하게 나타나는 첫 번째 장이다. 


그는 이 가족애를 보다 큰 사회단위로 차츰 확산, 어진 정치를 펼 것을 주장했지만, 이러한 가족중심의 설명방식은 그의 사사의 가장 커다란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어떤 신분의 사람이든지 관계 없이 가족으로부터 최초의 인간관계를 경험하고 애착을 갖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가족으로부터 출발하는 공자의 구체적 접근방식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가까운 것에 치우치는 것을 당연시했으나 평등한 사랑은 아니었다. 아울러 보수적인 그의 사상은 신분제의 철폐로 나아가지 않았다.


공자의 '인'은 전국 중기의 맹자에 의해, '예'는 전국 말기의 순자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었다. 맹자는 성선설에 기초하여 왕도정치의 구현을 강조했으며, 순자는 성악설에 의거, 환경과 후천적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니 법의 중요성도 크게 부각되었다. 한비자와 이사는 순자의 제자였다. 


묵자의 이름은 묵적. 그 역시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는 낮은 신분이었다고 생각된다. 초기에 공장의 사상에 심취했던 그는 공장의 인이 차별적인 사랑임을 깨닫고, 무차별적인 사랑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겸애설'로 일컬어지는데, 겸애란 다른 사람의 신체, 가족, 국가를 자기의 것과 독같이 여기는 것이다. 빈번한 전쟁은 각국 군주의 이기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므로 전쟁은 즉각 중지되어야 하며, 유가에서 미화되는 귀족들의 호화로운 장례도 중지되어야 한다. 


그는 단순히 사상의 주장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사상의 실천에 앞장섰다. 직접 신성한 노동에 종사했으며, 근검절약의 생활을 실천했다. 그의 평등의식과 검증을 요구하는 논리적 사고방식은 귀족적 신분제, 운명론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나아갔다.


도가의 시조는 노자다. 그의 이름은 이이, 초나라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가 실존인물이었다는 것조차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의 사상은 전국말기, 장자에 의해 정리되어 흔히 노장사상이라고 불려진다.


도가의 중심사상은 '도'다. 도란 사물의 근본을 따져나갈 때 맨 마지막에 남는 것이다. 즉, 우주만물의 생성근원으로, 천지만물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천지만물이 벗어날 수 없는 위대한 힘이다. 


그것은 유일하고 절대적이며 불변하는 것. 이 도를 제외하면, 우주적 존재들은 모두 상대적이고 허무해서, 서로 대립되는 것들의 그 대립조차 무의미한 것이다. 인가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어서 도라고 말해지는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모든 인위적이 노력은 도에서 멀어지게 할뿐이다. '무위자연'만이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며, 문명 이전의 원시사회로 복귀할 수 있다면 그때에 인간을 가장 행복할 것이다. 


매우 난해하면서도 또한 매우 매력적인 도가의 사상서인 <도덕경(노자)>과 (장자)는 그 풍부한 상상력과 낭만적인 언어 구사로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혀지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성경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번역되는 책의 하나이다. 


대개 유가는 지배층의 철학으로, 도가는 피지배층의 철학으로 발전했는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흔히 중국사람들은 '공인으로서의 유가, 개인으로서는 도가'라고 하듯이, 고도의 긴장 생활을 요구하는 유가와 이를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도가는 상호대립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 시기 현실적인 정치에서 가장 커다란 힘을 발휘했던 사상은 역시 법가이다. 당시의 군주들은 제가의 사상에 모두 귀를 기울이고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으나. 실제로 구현한 것은 법가의 사상이었다. 


이회, 상앙, 신불해 등의 관료들은 모두 법가의 선구자들이며, 진의 통일도 이사 등의 법가적 실천에 의해 이루어졌다.


법가의 사상을 완성한 사람은 전국 말기의 한비자이다. 그의 이름은 한비, 본래는 한자라고 불렀으나, 당나라의 명유인 한유와 구별하기 위해 한비자라고 부른다. 그는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 


현명한 군주는 고대사를 모범으로 삼아서는 안되며, 현실의 상황을 직시, 이에 상응하는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봉건제를 타파하고 관료제를 채택해야 하며, 규범으로서의 법과 법을 실천하는 수단으로서의 술을 강조했다. 그는 동학이었던 라이벌 이사에게 모함을 받아 살해당했다.


이외에도 일종의 논리학인 명가, 세계를 음양의 2원적 원리에 의해 설명하는 음양가, 우주만물이 '목화토금수'로 구성되었다고 주장, 이의 운행으로 모든 변화를 설명하는 오행가, 외교와 변설을 중시하는 종횡가 등도 출현했다.


병가의 서적인 (손자병법P은 전국시대의 실전경험에서 출발한 고도의 전쟁이론서이자, 심원한 인생철학을 담은 명저로 오늘날까지 널리 애독되고 있다. 손빈은 친 구 방연의 모함으로 두 다리의 힘줄을 잘리는 형벌을 받은 후 저술에 몰두, 이 책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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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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