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6. 주나라의 봉건제도
은의 제후국에 불과하던 서방의 주족이 눈부시게 성장, 마침내 은을 멸하고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은의 지배기에 황하 중하류 지역에 그치던 중국적 세계는 북중국 전역으로 확대, 동아시아 최고의 문명권을 이루었다. 중국 위주의 천하관과 화이의 관념이 시작되었고, 천명사상, 혈연 중심의 예문화 등 중국문화의 뼈대가 마련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주족의 시조는 후직이다. 그의 어머니 강원은 들에서 바윙에 새겨진 신의 발자국을 밟은 후, 이상한 기운을 느껴 그를 잉태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삼과 콩을 재배하기를 좋아했는데, 놀랄 만큼 결실이 좋아서 사람들은 그로부터 농사의 기술을 배웠다.
주족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 부근, 비옥한 관중평원에서 농업의 기틀을 닦으면서 성장했다. 이곳은 농경에 적당할 뿐 아니라 천연의 요새이며, 또한 감숙방면으로부터 서방문화가 중국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경로이다.
전국을 통일한 진도 이곳에서 성장했다. 후직의 10대손인 고공단보 때에 기산 아래 주원(기주)에 정착했다. 이곳은 예부터 주의 청동기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곳으로, 주의 명칭도 이로부터 유래한다.
고공단보의 아들 계력 때 주의 국력은 크게 성장, 은의 경계를 사기에 이르렀다. 계력은 은 왕실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그의 아들 문왕은 유명한 태공망 여상의 보필 속에 비약적 발전을 거듭, 은은 서백의 칭호를 주고 이를 회유하려 했다.
문왕 때에 은 정벌의 계획은 이미 수립되었으며, 그의 아들 무왕에 이르러 이 계획은 실현되었다.
마침 은의 주왕이 동방의 대정벌에 나섰다. 기회를 포착한 무왕은 목야의 결전에서 은의 대군을 격파했다. 전쟁에서 패한 주왕은 궁전을 불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흔히 주왕은 아름다운 달기와의 사랑에 빠져 국정을 소흘히 했다고 전해지는데, 은의 계속된 무력정벌과 지배층의 화려한 생활이 은의 국력을 피폐하게 했다.
순장이나 갑골문에 등장하는 각종의 형벌이 말해주듯이, 은 왕실의 잔혹한 지배는 백성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또한 은나라 사람들은 술을 너무 좋아해서 멸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은을 정복한 주는 이를 경계, 음주를 특별히 통제했다.
무왕은 도읍을 호경으로 옮겨 주왕조를 개창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후 주왕실은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주의 지배력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왕이 갑자기 죽고 그의 어린 아들 성왕이 즉위하게 된 것이다. 이때 크게 활약, 주의 지배력을 공고히 한 사람이 무왕의 동생 주공 단이다.
주공은 동방의 거점인 낙읍(하남성 낙양 부근)을 제2의 수도로 건설하고, 은의 잔존세력의 반발을 평정했으며, 3년간의 대 동방원정을 감행하여 주를 명실상부한 중원의 지배자로 부상시켰다.
그러나 그는 긑내 왕위에 오르지 않고 성왕을 슬기롭게 보좌함으로써, 훗날 공자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주왕실은 방대해진 영토와 주민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다스려야 할 것인지 커다란 고민에 빠졌다.
아직 청동기 단계에 불과한 당시의 기술수준에서 북중국 전체를 중앙에서 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어차피 간접통치를 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면 각 제후들을 포섭, 통제하여 반란에 쐬기를 박을 수 있을까?
이때 창안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체계적 통치제도가 바로 봉건제도다. 봉건제도란 직할지를 제외한 전국의 확장된 영토에 왕실의 혈족이나 공신을 제후로 임명, 다스리게 하는 제도로, 제후는 왕에 의해 봉해져서 해마다 공물을 바치고 유사시에 병력을 지원했으나, 지역의 내정에는 간섭을 받지 않았다.
주 왕실은 이러한 지역분립을 극복하고 주왕실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봉건제도에 '현연적'인 특색을 가미했다. 왕실과 제후는 단순히 정치적인 군신관계일 뿐 아니라, 본가와 분가의 관계, 즉 공동의 조상을 모시는 한집안임이 강조되었다.
아울러 '천명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널리 유포, 주왕실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하늘은 주 무왕에게 포악한 은의 주왕을 멸하고 주왕조를 개국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므로 은, 주왕조의 교체는 단순한 무력 쿠데타가 아니라, 하늘의 듯을 반영한 것이다. 이 논리에 의하면, 백성들은 불가항력적으로 주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주의 지배에 반항하는 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무서운 죄악이 되는 것이다.
주의 지배는 제사의식으로 완성되는 것이었으나, 은나라처럼 대규모 피의 제물을 바치는 일은 사라졌다. 이는 주의 문화가 보다 질박하고 합리적으로 발전했다는 얘기가 된다.
주왕실의 조상을 모시는 종묘가 도읍의 중심에 자리잡고, 심지어 주가 정복한 은의 제사도 중시되어서, 그들 조상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후손을 제후국에 봉했다. 제사의식과 관련하여 독자적 예문화가 정착, 이후 중국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주나라는 기원전 770년 유목민 견융의 침입을 받았다. 주 유왕은 여산 기슭에서 살해되고, 주 왕실은 도읍을 동쪽의 낙읍으로 옮겨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이를 주의 동천이라고 하는데, 이때부터를 동주, 그 이전 시대를 서주 시대로 칭한다. 동주는 다시 춘추와 전국으로 나뉘어져 춘추전국시대로 불리는데, 춘춘시대는 공자의 책명 (춘추)에서, 전국은 전한시대의 저술인(전국책)에서 따온 이름이다.
서주의 멸망에 관해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유왕은 포사라는 후궁을 몹시 사랑했는데, 그녀는 이상하게도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보로 봉화가 올려졌다. 다급해진 제후들은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도읍으로 달려왔으나, 오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모두들 넋빠진 모습이 되었다.
이를 본 포사는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왕은 그녀의 아름다운 웃음을 다시 보기를 원했고, 자구만 봉화를 올렸다. 거듭 속아왔던 제후들은 정작 견융의 침입으로 주왕실이 위기에 닥쳤을 때는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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