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3. 남성의 시대로
용산문화는 원시공동체 사회가 신석기 말기에 이르러 어떻게 계급사회로 이행했는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농경기술이 더욱 발전, 광대한 황하유역이 모두 농경지대로 바뀌어갔고, 이를 기초로 중국문명의 원형이 탄생했다. 풍부한 수확물은 인구를 증가시키고, 인간의 정신문화를 보다 풍족하게 해주었으나, 이의 획득을 놓고 씨족 내부의 갈등이 생겼고, 다른 씨족과의 전쟁 또한 빈번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1930년 황하 하류의 산동성 용산현 성장애에서 용산문화의 유적이 처음으로 발굴되었다. 그곳에서는 다량의 석제 농기구와 함께 검게 빛나는 흑색 토기가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너무 인상적인 것이었다.
학자들은 이를 양소의 채도와 대비, 웅대한 가설들을 세워나갔다. 용산유적의 발굴에 참여했던 부사년은 황하 중류를 채도 문화권으로, 황하 하류를 흑도 문화권으로 대별하고 이른바 화이 동서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마치 빙산의 일각을 보고, (여기에 앙소가 있고, 저기에 용산이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았다. 최근까지의 고고학적 발굴은 이들이 물 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안양시 후강의 한 유적에서는 최하층에 앙소문화, 중간층에 용산문화, 최상층에 은의 문화층이 발굴되었고, 묘저구 제2문화층에서는 앙소에서 용산문화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형태의 토기 유형이 발굴되었다.
용산문화는 앙소문화와 동시대의 이질적이 문화가 아니라, 이를 계승, 발전시킨 신석기 후기의 문화였다.
그렇다면, 채도에서 흑도로의 변화는 일종의 유행의 변화로 보면된다. 중국의 신석기인들은 다양한 색깔과 무늬를 넣어 토기를 장식하는 것에 싫증을 내고, 무늬가 없고 기형이 보다 충실한 토기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기술도 진전되어, 앙소인들은 대개 손으로 빚어서 토기를 만들었는 데 비해, 용산인들은 회전대를 사용했으며, 달걀껍질같이 얅고 광택 나는 토기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앤더슨은 앙소의 채도가 서아시아의 것과 비슷한 것에 감탄, 서아시아 전래설의 심증을 굳히고, 서쪽으로의 낭만적인 고고한 여행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는 앙소 서쪽의 채도가 오히려 더 후대의 것임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의 가설이 황당한 것은 아니었으나, 서로 교류가 없는 상태에서도 지구상의 여러 곳에서는 비슷한 문화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용산 시기의 문화유적은 현재까지 약 300곳이 발굴되었는데, 그 문화의 정수는 산동지역에서 꽃피었다.
용산 문화기에 이르러 농경은 더욱 확대되었다. 화석화된 벼껍질, 토기에 박힌 낟알 자국 등은 이 시대에 벼농사가 행해졌음을 말해준다.
반달모양 돌칼이나 돌낫, 나무 보습 등 새로운 농구가 개발되었다. 농경은 보다 확실한 생활수단이 되었으며, 가축사육도 보다 높은 수준에 달했다.
이제 농경에 남성들의 근력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고, 그 수확물이 확대될수록 남성의 권력이 점차 강화되었다. 남성의 묘에서는 생산도구가, 여성의 묘에서는 물레틀이나 머리 장식품 등이 출토되었다.
방직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생산활동에서 남성의 역할이 더욱 중요시되면서 여성의 지위는 점차 남성에게 종속되게 되었다.
저장할 곡식이 더욱 많아졌고, 사유재산의 개념이 출현했다. 남성들은 사유재산을 자신의 아이에게 상속하기를 바랐다. 분명한 자기아이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느 여성을 독점해야 했고, 이에 다라 일부일처제의 혼인제가 성립하게 되었다. 가끔 남녀 합장묘가 발굴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을 알려준다.
세습적인 지도자가 출현했고, 씨족간의 평등한 관계도 깨어지기 시작했다. 묘지들은 이제 모양과 크기가 일정하지 않았으며, 부장품의 수와 종류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부장품이 1점 출토되는 묘가 있는 반면, 160점이 발굴되는 경우도 있다. 지도자는 점차 지배자로 변해갔고, 세상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갈라지기 시작했으며, 빈부의 차이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사회는 더욱 확대되어 앙소기의 5배 혹은 10배의 큰 마을이 생겨났다. 집은 앙소기와 큰 차이가 없었으나, 한 간짜리 움집 외에 두간짜리 집도 발견되고 있다. 주거지 주위에 서서히 성벽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도랑으로는 맹수는 피할 수 있었으나 다리를 놓고 건너오는 외적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성벽은 두 쪽의 판자 사이에 흙을 넣고 물을 부은 다음, 발로 짓이기는 우너시적 시멘트 공법, 즉 판축 공법으로 구축되었다. 성은 전쟁의 거점이 되었고, 각 부족간의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광대한 중원, 황화 유역에는 방, 읍, 국으로 불리는 성읍도시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청동기 시대에 이르면, 이들 무수한 성읍국가 중에서 강성한 국가가 출현, 최초의 고대국가를 창출하게 될 것이다. 중국의 초기 국가 전설은 이들이 부족간의 빈번한 항쟁 속에 도읍을 무수히 옮기고 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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