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5. 신에게 묻는다
총 말기인 1889년 어느 날, 갑골의 파편이 한 병든 학자의 집에 찾아들면서 3천년이 넘도록 땅 속에 감추어져 있던 은나라의 신비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 학자의 이름은 왕의영. 그는 당시 유일한 국립대학이었던 국자감의 제주, 즉 대학총장으로 있었는데, 금석학 등 고학문에 조예가 깊어서 그의 문하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고, 그중에는 유철운도 있었다.
왕의영은 말라리아라는 지병이 있어서, 특효약으로 소문난 용골을 갈아서 약재로 쓰고 있었다. 용골이란 북경원인의 발굴에도 단서를 제공했던 바로 그 동물의 뼈이다.
용골이 막 빻아지려는 순간, 마침 그곳을 지나던 유철운이 문득 범상치 않은 글자의 흔적을 발견했다. 4년 후 그는 (철운장귀)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발간, 세간에 갑골문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용골의 출처를 찾아 나섰던 왕의영과 유철운에게 비자의 기업비밀을 쉽사리 알려줄 약재상은 없었지만, 이제는 골동품상을 통해 글자가 있는 용골이 고가에 거래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에서 하천이 범람, 갑골의 파편이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이 지역은 1928년부터 10년간 본격적인 발굴이 진행, 기원전 15년경부터 은이 주에게 멸망되었던 기원전 1100년경까지, 즉 은 후기의 도읍지 은허였음이 확인되었다.
은나라의 본래 이름은 상, 황하연변의 수많은 성읍국가 중의 하나였던 상읍이 주변의 성읍국가들과 연합, 주도권을 구축해나갔다.
아직 대규모 수리공사도 없었던 시절, 농경지는 제한되어 있고, 주변에는 수렵을 위주로 하면서 호시탐탐 농경민을 약탈하고자 하는 종족들이 있었을것이니, 농경민들은 서로 연합하게 되고 은족은 그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사기)의 은 본기에 의하면, 탕왕에 이르러 하나라의 걸왕을 쓰러뜨리고 주변국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지위는 불안정하여 수도를 다섯 번이나 옮긴 후에야 은허에 정착하게 되었다.
거대한 도시유적 은허에서 가장 중요한 발굴은 역시 수만 편에 달하는 갑골편이다.
갑골은 점복에 사용되던 귀갑과 수골을 줄인 말로, 귀갑은 거북의 등껍질보다 배껍질이 많고, 수골은 소의 어깨 뼈가 많다.
이제 겨우 한자를 배우기 시작한 초보자의 눈으로도 갑골문 몇 자는 확인할 수 있듯이, 갑골문자는 한자의 원형이면 문장의 구조도 오늘날의 중국어와 같다.
세계의 고대문명 중에서 중국처럼 일관된 문화를 유지해온 나라는 없다.
갑골문의 연구는 왕의영, 유철운을 이어 나진옥과 그의 제자 와국유에 의해 집대성되어 은대의 사회를 보다 풍부하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삶이 모두 비극에 끝나 사람들은 이를 갑골문의 저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왕의영은 의화단 사건 이후, 외국 군대가 중국에 진주하게 되자 이에 분노, 자결했고, 백화문으로 사회를 풍자한 (노잔유기)를 남기기도 하고 기인으로 유명했던 유철운은 백성들의 참상을 보다 못해 정부의 허가 없이 관곡을 풀어 나누어준 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유철운의 친구였던 나진옥은 일본에 망명했다가 만주 괴뢰정권에 관련, 두고두고 지탄을 받았다. 청말의 대표적인 학자로 유명한 왕국유는 언제나 전통복장을 하고 변발을 허리께까지 드리우고 다녔는데,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에게 제왕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청조의 몰락을 바라보다가 이를 비관하여 자살로써 인생을 마감했다.
은의 왕실은 국가의 행사를 결정할 때마다 갑골로써 점을 쳐서'신의 뜻'을 묻고는, 갑골에 언제, 누가, 어떠한 내용으로 점을 쳤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기록했는데, 그것이 바로 갑골문인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국가의 중대사란 기상이나 자연현상, 농사의 풍흉, 자연재해, 제사, 전쟁, 수렵, 임신, 질병 등 온갖 것이 다 포함되며, 갑골은 일회용으로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은허의 한 갱에서는 한꺼번에 1만 7천 7백 편의 귀갑이 출토되기도 했다.
우선 갑골의 뒷면에 구멍을 내어 단상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낸다음, 이곳을 불로 지지면 균열이 생기게 된다. 이때의 균열의 형태나 수, 주변의 색깔 등으로 신의 뜻을 판단했다. 그것을 판단하는 자가 바로 왕이다. 왕은 신과 인간사회를 매개함으로써 권위를 인정받았다.
이러한 신정정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의 위대한 힘 앞에서 긑없이 무력감을 느껴야 했던 초기국가의 일반적인 정치형태다.
은나라 사람들은 10개의 태양이 땅 속에 있다가, 매일 하나씩 교대로 천상에 나타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열흘 간격으로, 도 다음 태양이 떠오르는 밤마다 일상적으로 점을 쳤다. 그 열 개의 태양의 이름이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즉 10간이다.
그들은 절대신인 상제로부터 10개의 태양신, 각종 자연신을 숭배했으면, 조상들이 이들에게 자신들의 간절한 바람을 전해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조상숭배를 각별히했다. 제사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왕의 가장 중요한 업무의 하나였다.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화려한 제단이 마련되고 술도 빚어졌다. 제단에는 수백 마리의 양, 소 등의 동물과 함께, 피정복민이 적게는 몇 명, 많을 때는 수천 명씩 목이 잘려진 채 제물로 바쳐졌다. 제사의 제물을 바치기 위한 전쟁이 수행되기도 했다.
은왕은 수천 명의 귀족 전사와 함께 대규모 원정을 수없이 감행했는데, 은나라에 복속된 연맹부족들은 공물을 바치고, 유사시에 병력을 제공하는 한편, 은의 제사를 공동을 받들었다. 즉, 당시의 제전은 은의 지배력을 확인하는 유일한 의식 절차로서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은허에서 갑골문 다음으로 찬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세계 최고 수준의 청동기들이다. 그 제작기술은 흔히 서양의 르네상스기에 비견되는데, 특히 청동제기의 정교함과 세련미는 따라갈 것이 없다. 제기는 반드시 하나씩만 만들어졌으니, 제사에 바친 그들의 정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청동기는 지배층의 독점물이었고, 그들에 의해 무기나 제기로만 사용되었다. 그들은 청동무기로 무장, 지배력을 주변지역으로 확대해나갔으며, 신의 후예임을 자처, 화려한 제사의식으로 백성들을 위압해나갔다.
생산활동은 오로지 평민들이 전담하게 되었지만, 생산기술에는 커다란 진전이 없었다. 그들은 청동문명의 혜택에서 소외되어 여전히 토기나 목기, 석기를 사용하고 있었고, 반지하기 움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을 살아서는 회랑으로 둘러싸이고 다시 토성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궁궐에서 사치스런 생활을 하고, 죽어서는 청동기, 옥기 등이 대량으로 부장된 화려한 무덤에 매장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대규모 순장의 풍습이다. 대형 묘에는 수백, 수천에 이르는 사람들이 왕의 사후 생활을 편의를 위해 생매장되었다. 아마도 이들은 전쟁포로이거나 피정복민 노예였을 터였다.
훗날, 진시황의 무덤에서는 수천의 도용들이 이를 대신하게 되니, 생산력의 발달은 지배와 전쟁의 목적을 단순히 수확물을 얻기 위한 것에서, 토지와 백성의 획득을 위한 것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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