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84. 일본의 대륙침략
만주사변과 만주국의 등장(1931년)
< 1931년 9월 18일 오후 10시 30분 중화민국 동북변방군의 한 부대가 봉처 서북쪽 영 부근에서 우리(일본) 남만주 철도를 폭파하고 여세를 몰아 우리의 수비대를 습격했다. 적대행동을 개시한 것은 그들(중국)이며 스스로 화를 자초한 장본인이다.
원래 우리 남만주 철도는 지난해 조약에 근거하여 정당하게 획득했고 우리가 소유한 것으로 다른 나라가 손댈 수 없다. 중화민국 동북군은 감히 이것을 침범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일본제국 군대에 발포까지 했다. 본관은 철도 보호의 중책을 지고 있는바, 그 권익을 지키고 제국 군대의 위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 소화 6년 9월 19일 >
일본은 이와같은 공식입장을 밝히고, 도발자인 중화민국을 '응징'하겠다고 군대를 동원했다. 이른바 '만주사면'의 시작이다.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봉천은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 두절되었다. 중국정부는 일본과의 직접 대결을 피하고 국제연맹에 이 문제의 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중국의 한 지역에서 발생한 무력충돌은 유럽의 더 큰 문제들 때문에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특히 영국은 일본을 감싸기까지 했다. 결국 국제연맹 이사회는 일본정부의 주장에 가깝게 아래와 같은 결의를 하고 그 문제를 마무리해버렸다.
1. 만주에 대해 영토적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일본의 성명을 중시한다.
2. 일본정부는 그 국민의 안전 및 재산보호가 확보되는 대로 군대의 철수를 가급적 빠르게 시행한다.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해 중국인들은 격렬한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전국 주요대학에서는 '항일 구국회'가 결성되었다. 남경의 중앙대학 학생 4천여 명은 일본과 싸울 것을 주장하면서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또 그들은 중국정부 외교부에 뛰어들어 외교부장인 왕정정에게 잉크병을 던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일본과 싸우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아직 국내에서 공산당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중앙당 집행위원회는 (전국학생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했다.
<싸워햐 할 때 싸우지 않고 나라를 멸망시킨다면 그 죄는 정부가 져야한다. 그러나 싸우지 않아야 할 때 싸워 나라를 멸망시킨다면 그 죄 또한 정부가 져야한다. 이 큰 어려움을 당해 국민이 정부를 신임하지 않고 비난만 일삼는다면 건강한 나라라고 할 수 없다>
중국정부가 일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으면서 국제여론을 통한 압력으로 일본이 물러가기를 원했으나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결정한 사항을 이행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이미 그들은 만주지역에 친일정권을 수립한 다음 완전히 먹어삼키려고 했다.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를 장악하려는 관동 주둔 일본군의 음모는 아주 치밀하게 전개되었다. 원래 일본군부는 만주지역을 (만주친일괴뢰정권 수립 --> 만주국 독립 --> 일본의 영구 소유화) 라는 3단계 과정을 거쳐 일본영토로 편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제 1단계 친일 괴뢰정부의 황제로 낙착된 이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였다. 그는 만주족이었고, 한족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만주족의 독립적인 움직임으로 가장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관동군 사령관 혼조는 다음과 같은 만주지역 신정부 수립 3원칙을 일본각의에 제시했다.
1. 만주, 몽고를 중국 본토에서 분리시킬 것.
2. 만주, 몽고를 통일할 것.
3. 표면은 중국인이 통치하지만 실질적으로 일본이 장악할 것.
만주, 몽고를 일본의 영토로 만드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이지만 국제사회의 이목을 고려하여 차선책으로 만주, 몽고를 중국의 영토로부터 분리하여 독립국을 세운다는 것이다. 물론 그 독립국은 명목상일 뿐이고 일본의 조종과 지배를 받는 꼭두각시 정부가 될 것이었다.
이 독립국을 움직이기 위해 국방을 일본이 담당하고 철도, 항공로 등이 통제되며, 그것들을 감독하기 위해 독립국 내에 일본인으로 구성된 자문부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이 괴뢰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만주 주둔 일본군(관동군)의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우선 만주지역을 군사적으로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흑룡강성을 공격해들어갔으며, 천진을 공격하는 틈을 타 천진에 있던 청의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를 탈출시켜 만주로 데리고 갔다.
부의는 1912년 청조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황제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는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일정한 생활비를 받고 자금성에서 생활하고 있던 중 1924년 쿠테타를 일으킨 군벌 풍옥상에 의해 쫓겨나 천진에 머물고 있었다.
부의는 잃어버린 황제의 자리를 잊지 못하고 있었으며 언젠가는 되찾으려는 생각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일본이 만주국의 황제자리를 권유한 것이다. 부의에게는 더 이상 반가운 제의일 수가 없었다.
관동군의 제안에 대한 부의의 첫 질문은 그 국가가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인지 공화정인지였다. 부의는 다시 황제가 되고싶었던 것이다. 일본이 부의를 내세워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세우려하자 장개석은 마침내 일본의 만주침략에 정면대응하는 단안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중국 자체에 충분한 자위역량이 없는 한 국제연맹은 일본의 폭력을 제지할 결심을 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은 결코 철군하지 않으리라 본다. 중국은 이미 만주땅을 잃었다. 동포가 한 마음으로 협력해 이를 회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국제연맹을 신뢰하고 국제연맹이 정의를 옹호하고 공도를 주장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국내에서도 이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일본이 간단히 철수하지 않으리라는 점, 그리고 대련, 여순을 간단히 반환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 국민의 능력이며 세계의 공도이다. 우리는 최후의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피를 흘리겠다는 결심이다.'
중국은 만주지역을 장악하려는 일본의 침략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이에 일본은 국제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만주지방에 국제연맹의 조사단 파견을 제안했다. 국제연맹은 일본의 제안에 따라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사변이 일어난 이듬해 1932년 영국의 리튼 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단이 만주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조사단이 활동하고 있는 중에도 일본은 연이어 상해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의 피해는 사망 약 4천여 명, 부상 7천여 명에 이르렀다. 상해를 공격한 것은 국제여론이 만주에 집중되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만주의 괴뢰정부 수립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 우선 만주지역의 옛 군벌과 지방의 유력자들을 모아 1932년 2월 18일 만주의 독립을 선언하게 했다. 어디까지나 만주지역의 토착세력에 의한 것으로 보이게 했다.
신국가의 이름은 만주국으로 정하고 3월 1일 건국하기로 했으며 국가의 형태는 공화국으로 결정했다. 그러자 황제의 지위를 바라고 있던 부의는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그러자 관동군에서는 공화제 아래의 원수직을 주겠다고 하여 반발을 무마했다. 그 영역은 봉천, 길림, 흑룡강성의 동 3성으로 인구는 약 3천만 명 정도였다.
중국정부는 이러한 만주국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
'지난해 9월 18일 이후 일본은 불법으로 침략하여 중국인민을 협박하고 소수 반란분자를 이용해 비합법적 조직을 하여 부의를 데려다가 꼭두각시 정권을 만들었다. 이것은 모두 일본의 협박과 유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일본의 손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 이 불법행위가 일본에 의해 이루어졌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중국정부는 당초 이같은 정치조직은 반란기관이고 또한 일본의 부속기관이라고 간주해왔으며, 사태의 전책임은 일본정부가 져야 할 것이다'
중국정부는 이와 같은 공식발표를 하고 일본에 대한 적극적인 대항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은 만주국을 세우고 나중에 부의를 천황으로하는 만주제국으로 바꿨다.
이제 만주는 일본의 조종을 받는 괴뢰정부에 의해 지배되게 되었다. 이는 곧 일본의 만주지배를 의미했다. 이런 상태는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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