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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5.28 중국사 100장면 - 61. 자명종과 세계지도. 선교사들의 활동(17세기 초)

 

 

 

 

 

 중국사 100장면 - 61. 자명종과 세계지도 

 선교사들의 활동(17세기 초) 

 


중국에 서양의 크리스트 교가 들어온 것은 당때였다. 그러나 그때의 크리스트 교는 정통 카톨릭이 아닌 이단의 한 파였다. 정통 크리스트 교가 중국에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명대 후반기 부터다.


명나라 때 중국에 크리스트 교를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제주이트 교단이다. 이 교단은 중국에서는 '야소회'로 불렸다. 제주이트 교단은 1540년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라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 성립한 카톨릭 포교단체다.

 

이 교단이 창립되던 16세기 유럽에서는 카톨릭 교단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프로테스탄트(개신교)들의 활동이 활발하던 때로서, 루터나 칼뱅의 종교 개혁이 이 시기를 전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주이트 교단은 이런 분위기에서 점점 위축되어가는 카톨릭의 자기혁신 및 교세확장 운동의 하나로 나온 것이다. 이들의 중심사업은 이교도 지역에 대한 카톨릭 포교활동이었다.


1542년 제주이트 교단의 창설자의 하나인 프란시스 자비에르는 인도를 거쳐 일본에 도착했다. 이것이 일본에 카톨릭이 들어오는 시초다. 그는 중국에 들어가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중국 카톨릭 전파의 가장 큰 공로자는 마테오 리치(중국명 이마두)였다. 그는 1583년 광동을 통해 중국에 입국했으며 1598년에는 북경에와 황제를 만나 북경에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는 중국에는 없는 자명종(시계), 세계지도 등을 가지고 왔으며, 서양 문물 및 서양 실정을 중국인들에게 알리는 다리 역할을 했다. 물론 그의 절대적인 목표는 카톨릭 전파였다.

 

그는 북경 근처에 포교당을 짓고 주로 중국의 고위관리들과 친교를 맺은며 그들을 카톨릭에 들어오게 했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서광계, 이지조, 양정균 등 명의 고위관리들이었다.

 

고위관리들을 중심으로 카톨릭을 소개하는 것은 제주이트 교단의 포교활동 지침의 하나였다. 선교사들은 중국에 와서는 중국어를 익히는 등 중국인들에게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유학자들의 복장을 했으며 관리들에게 망원경, 자명종 등 신기한 물건들을 선물하기도 했다.


마테오 리치는 또한 중국인들에게 카톨릭을 소개하는 책을 중국어로 썼는데, 그것이 유명한 <천주실의>다. 이 책은 조선에 들어와 조선에서 천주교가 자생적으로 탄생하게 하는 촉매열할을 하기도 했다. 


<천주실의>에서는 크리스트 교는 불교보다는 유교에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을 강조하여 중국인들의 육교적인 사고방식에 접근하고자 했던 흔적이 보인다. 그는 1610년에 사망했는데, 당시 중국의 카톨릭 신자 수는 약 2500여 명이었다. 그의 사후 교세는 더욱 확대되어 명나라 말기에 이르면 약 15만 명 정도로 증가했다.


그러나 청대에 들어오면 중국의 카톨릭 선교활동에 변화를 보이게 된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명대에 활동했던 선교사들이 유교와의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카톨릭의 내용을 상당부분 유교에 맞추려고 했던 점이다.

 

크리스트 교의 신과 유교에서의 상제가 같다고 하여 공자의 제사나 조상숭배 등도 인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뒤에 중국에 들어온 도미니크 회나 프란시스코 회 등은 제주이트 교단의 이러한 유교와의 타협이 카톨릭의 교리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특히 제주이트 교단이 주로 지배층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했던데 비해 도미니크 회나 프란시스코 회는 탁발수도회의 전통대로 일반 백성들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중국에서의 제주이트 교단의 활동은 로마 교황정에서 문제가 되었으며 청나라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청나라에서는 1706년 강희제 때 마테오 리치의 입장을 인정하는 선교사들에게만 중국에 머무를 수 있도록 했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중국인 카톨릭 교도가 유교의 제사를 지내는 것을 못하도록 했다. 옹정제 때에는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크리스트 교 자체를 금지시키기에 이르렀다.

 

선교사 중의 몇몇은 궁중내의 기술자나 황가 등으로 남아 있었으나 크리스트교 선교활동은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뒤 중국에서 크리스트교 활동의 자유가 인정된 것은 제2차 아편전쟁에서 청이 영국과 프랑스에 패한 이후 맺어진 베이징 조약에서다.


선교사들의 중국 선교활동은 카톨릭 전파 말고도 서양의 학문이 소개되는 하나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천문학, 지리학, 수학, 같은 어느 한 분야를 전공하게 하여 선교활동에 활용하도록 교육을 받았으며, 선교활동 과정에서 이런 자연과학 지식의 일부가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의 세계지도를 제작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곤여만국전도>가 있다. 이 지도의 특징 중 하나는 중국이 지도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중화의식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세계의 위치와 각 지역의 여러 사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알레니의 <직방외기>는 중국인들에게 중국 밖의 또다른 세계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청나라 강희제 때는 선교사에게 청나라의 영토와 주변 속국들의 위치를 실제 측량하여 그리게 한 <황여전람도>가 작성되기도 했다.

 

마테오 리치의 수학지식을 서관계가 정리한 <기하원본>은 유클린트 기하학을 소개하고 있다. 그 외에도 달력에 관한 것, 무기 특히 화포 만드는 기술 등이 중국에 알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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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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