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59. 만주족, 다시 일어나다
만주족의 재통일과 후금의 건국(1616년)
오래 전부터 만주지방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민족이 있었는데, 그들은 시대에 따라 숙신, 말갈, 여진족 등으로 통했으며 명나라 때에는 만주족이라고 불리었다.
그들의 조상은 12~3세기경 통합을 이루어 금나라를 세우고 송나라를 제압하는 등,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가 몽고제국에 의해 멸망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후 만주족은 원나라와 명나라의 영향력 아래 부족 단위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송화강 유역의 해서여진, 장백산 일대의 건주여진, 연해주 일대의 야인여진이라는 3개의 큰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만주족을 통일하여 다시 중국대륙을 장악하는 발판을 마련한 사람은 누르하치였다. 그는 건주여진의 부족장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명나라에 충성을 바치며 세력을 유지했던 부족장으로, 명나라에 반대하는 아타이 세력이 명의 공격을 받을 때 그들을 설득하여 명에 항복하게 할 목적으로 아타이의 성에 들어갓다가 억류되었다.
누르하치의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가 나오지 않자 아타이의 성에 들어갔다 똑같이 억류당했다.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명나라가 아타이를 공격하는 과정에 죽었다.
이것이 누르하치의 가슴 속에 갚은 원한으로 남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면서 "우리 조상은 대대로 명에 순종하면서 살았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죄없이 명에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도저히 씻을 수 없는 한이다"라고 하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세력을 키워 스스로 명나라와 대적할 정도에 이르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명나라에 복종했다.
당시 만주지역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던 사람은 이성량이라는 명나라 장군이었다. 누르하치는 이성량의 보호와 원조를 받으면서 세력을 확대해갔고, 누르하치의 세력확대는 이성량에게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왜냐하면, 만주에서 많이 나는 인삼이나 모피, 진주 등을 구입하기 위해 모여든 명의 상인들은 이성량을 거칠 수밖에 없었고, 이성량과 누르하치는 중간에서 많은 이익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량은 부를 축적하는 데 눈이 멀어 만주지역의 북방민족을 다스리고 통제해야 하는 자기의 임무를 저보리고 있었다. 결국 이성량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보고에 의해 그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지 못한 것이 알려져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동안 누르하치는 세력을 크게 확대했고, 새로이 파견된 명의 만주 책임자들은 이미 강성해진 누르하치의 세력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결정적으로 누르하치에게 유리한 기회를 제공한 것은 일본의 도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이었다.
명은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조선에 원군을 보냄으로써 국가사정이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누르하치에게는 하늘이 도운 기회였다. 명나라가 일본과 싸우는 틈을 이용해 누르하치는 여러 부족을 통합하면서 내부체제를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 것이다.
1616년(만력44년) 마침내 누르하치는 대부분의 만주족을 자기 세력 밑에 넣어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 칭하고 요령성에서 왕위에 올랐다. '후금'이라는 이름은 12세기경 그의 조상들이 세웠던 금나라를 계승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후금은 본격적으로 명과의 대결상태에 들어갔다. 후금의 군대조직은 그들의 유목적 전통을 바탕에 두고 있는 팔기군이었다.
이 제도는 부대편성을 한 다음 각 부대마다 색깔이 다른 깃발로 구분한 것인데, 이것은 단순한 군대조직이 아니라 빈번하게 이동하는 유목족에 있어 사회조직의 기능도 했다.
즉, 만주족이면 남녀노소가 모두 팔기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군사기능과 아울러 징세, 행정의 기능을 함께하는, 그야말로 유목민 특유의 사회 군사조직이었다.
이러한 독특한 사회조직은 평상시에는 생산활동에 종사하고 전쟁시에는 그대로 부대편성으로 이어지는 등 효율적인 기능으로 만주족의 세력확대에 큰 힘을 발휘했다.
나중에 가면 정복한 지역의 민족들을 그 민족들에 다라 독자적인 부대로 편성하면서 팔기제도가 정착되게 이른다. 누르하치가 왕위에 오를 무렵의 후금 군대는 약 10여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후금은 군대를 동원, 명의 영토였던 무순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러자 명에서는 만주족 토벌을 위한 군대 동원령을 내리고 요동의 심양에 주력군을 주둔시켰다.
명과 후금의 대결을 결정적으로 후금에게 유리하게 만든 유명한 전투가 바로 무순 동쪽 50km 지점에서 벌어진 살이호의 전투다.
1619년 이 전투에서 명의 대군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둔 후금의 군대는 심양, 요동 등을 그들의 영역 안으로 아루렀고, 1625년에는 심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중국대륙을 향해 한발 더 다가들게 된 것이다. 후금은 그들의 정복활동의 대의 명분을 살리기 위해 전투에 나설 때는 몇 가지 원칙을 군인들에게 지키게 했다. 예를 들면,
"싸워서 잡은 포로의 옷을 벗기지 말라"
"여자를 납치하지 말라"
"대항하지 않는 자는 죽이지 말라" 등이었다.
누르하치는 1626년 관녕성을 공격하던 도중 부상을 입고 그해 8월 68세로 죽었다. 그가 죽은 후 2대 황제 태종이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후금에서 '청'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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