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55. 명목적 조공과 힘의 논리
월남과 중국의 월남 정복(1407년)
인도차이나 반도의 월남과 중국의 관계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던 진시황 시대 중국은 양자강을 넘어 지금의 광동이나 광서지방 및 남쪽으로 월남지역을 징벌하게 됨으로써 월남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진이 멸망하고 한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는 때를 전후로 해서 월남지역에 남월이라는 족립적인 왕국이 수립된다. 남월을 세운 조타는 중국출신으로 토착 월남인의 지지를 바탕으로 나라를 건국한 것이다.
한이 중국을 통일했을 때 남월국은 자청하여 중국의 조공국이 되어 선진적인 문화를 수입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중국에 대한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여 끊임없이 중국의 경계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무제는 고조선을 멸망시키기 몇년 전인 기원전 112년 월남지역을 정복하여 중국의 군현에 포함시켰고, 이후 월남은 10세기까지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당나라 때 월남은 안남도호부에 속했으며, 당나라가 멸망하고 기원후 10세기를 전후로 한 시기 중국이 5대 10국의 분열기를 맞을 때 다시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월남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월남인에 의한 국가가 수립된 것이 바로 이때다. 중국이 분열하여 대립하고 있는 동안 월남의 토착세력인 고구엔이라는 사람이 경쟁자를 물리치고 오왕조를 수립한 것이다.
이때가 939년이니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거의 비슷한 시기다. 당나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건국되는 과도기로, 중국세력이 월남지역에 신경을 크게 쓸 수 없었던 시기를 틈타 중국세력으로부터 벗어나 당당하게 나라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 송나라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송나라는 월남에서 975년 내분으로 왕이 살해되는 것을 빌미로 하여 월남을 침공했다.
월남은 980년 육지와 바다 양면에서 공격해들어오는 송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월남을 중국 영토화하려는 중국세력의 의도를 일단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송나라의 침략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대립관계를 지속시킨다는 것은 힘에 벅찬 일이었고 결국 월남은 송나라와 일정한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침략군을 몰아낸 월남은 그 이듬해 사절단을 파견하여 잘못을 빌고 조공을 청해 다시 송나라의 조공국이 되었다.
그러나 송나라의 왕안석이 중국정치를 주도하고 있었을 때 그는 다시 월남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는데, 그 낌새를 월남에서 알아채고 역습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054년 국호룰 대월로 한 월남왕조는 송의 남쪽 국경지역을 공격, 상당한 지역을 빼앗고 10만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롤 잡아갔다. 일격을 당한 송은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반격을 가했으나 월남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송군을 격퇴한 후 다시 월남은 조공관계를 회복했다. 월남은 중국과는 형식적인 조공관계를 유지했지만 인도차이나 반도 내에서는 강대국으로서 주변 여러 나라를 국복시키고 조공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대월의 이조를 계승한 진왕조(1225--1400) 때 중국에는 몽고 제국이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월남 역시 몽고제국의 침략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진왕조는 1257년, 1284년, 1287년 세 차례의 침략에서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몽고군을 물리쳤고 1288년에 원과의 조공관게를 맺었다.
이렇게 월남은 중국의 침략에 단호하게 대응하여 그들을 격퇴한 다음 불리하지 않은 조건에서 조공관계를 열어 그들의 독립성을 확보하면서 평화적인 관계를 맺는 방식을 취했다.
원의 세조 쿠빌라이 칸 때 원나라는 월남의 지배 아래 있던 참파국을 치겠다고 길을 터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월남이 이를 거절하자 다시 원은 두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했다.
월남을 공격한 원은 두 번 모두 수도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왕을 사로잡지도 못하고 끝까지 저항하는 월남인들을 제압하지도 못한 채 철수해야 했다.
중국에 원을 이어 명나라가 들어서고, 영락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월남에서는 정변이 일어나 진씨 왕조가 무너지고 호씨 왕조가 들어섰다.
명은 이를 기회로 왕위를 빼앗은 자를 징벌한다는 명목으로 1407년 월남을 침략, 다시 월남에 대한 직접 지배의 길을 열었다.
영락제의 통치시기에 몇 차례의 저항이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영락제가 죽은 이후에야 월남 세력은 레로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명나라에 저항하여 침략자를 밀어내고 1428년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레로이에 의해 수립된 후여조의 시기는 월남 문화의 융성기였다.
청조에 들어오게 되면 후여왕조는 완씨와 정씨 세력의 대립으로 분열되어 정씨는 북부, 완씨는 남부를 세력의 근거로 삼았다.
완씨 세력이 명목만으로 왕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후여왕조를 누르고 새로운 왕조를 수립할 움직임을 보이자 청나라는 이를 빌미로 월남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월남인들은 청군을 크게 격파하여 청에 대해 유리한 위치를 유지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로 개척하려는 서양 세력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월남은 격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이후 20세기 중반까지의 월남역사는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벗어나려는 끊임없는 저항을 하여 독립을 쟁취했고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베트남은 완전한 통일된 독립국을 이루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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