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52. 한족, 다시 중국 대륙의 주인으로

주원장의 명나라 건국(1368년)

 

 

주원장은 안휘성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배움도 없었고 집안도 미천했으며 17세 때 악질과 기근으로 부모형제를 잃고 황각사라는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절이라고 해서 어려운 생활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고 절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도 배고픔을 면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탁발을 하여 주린 배를 채웠다.

 

그가 후에 명을 건국하여 황제가 되었을 때 어떤 기록자는 그에 대해 "떠돌이 거지로 출발하여 나라를 세웠으나 눈으로는 글을 읽지 못했다"라고 쓸 정도였다. 다소 과장이기는 하겠지만 주원장의 처지와 집안형편을 생생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가 태어나서 자란 시기는 원나라가 중국을 통치하던 때다. 원나라의 통치 아래서 중국인들의 생활은 몹시 어려웠으며 농민들이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홍건적의 난이다.

 

그는 황각사에 있을 때 홍건적의 반란군을 만나게 되어 홍건적에 가담하게 된다. 이때가 1352년으로 그의 나이 25세 되던 해다.


그가 황각사를 떠나 홍건적의 한 무리였던 곽자흥 조직에 들어갔을 때 그는 외부로부터 침입한 첩자로 오인되어 체포되었으나 곽자흥은 그의 생김새가 기이해서 그를 풀어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확자흥군 밑에서 많은 공을 세워 곽의 신임을 크게 받았으며 곽의 양녀를 아내로 삼았다. 주원장의 아내가 된 이여자는 원래 마씨 성을 가진 사람이 유괴하여 곽자흥에게 팔아넘긴 까닭으로 마씨 성을 갖게 되었으며,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여 황제가 되자 그녀는 황후가 된다.


주원장이 섬기고 있던 곽자흥 세력은 원나라 토벌대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당했으며 주원장은 줄어든 병력을 채우기 위해 고향으로 가서 군대를 모집했다.

 

당시에는 농민들이 굶주렸으며 원에 대한 반감이 있었기 때문에 먹을 것만 해결해줄 수 있다면 군대를 모으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가 사람들을 모아 돌아왓을 때 곽자흥군 내부에 분열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이에 주원장은 아예 곽자흥을 떠나 독자적인 세력을 거느리기로 결심했다.


곽자흥을 벗아난 주원장은 자기의 부대를 이끌고 남하하면서 계속 세력을 확대해나갔으며, 그가 남경을 장악했을 때는 2만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제 주원장은 자기가 섬기던 곽자흥의 세력을 능가하게 된 것이다. 그 세력을 몰아 주원장은 주변 세력을 하나씩 하나씩 장악해나갔으며, 1364년 주원장은 마침내 오나라의 왕을 자칭하게 되었다.


그는 양자강을 건너 남경을 장악, 세력의 근거지로 삼았다. 강을 건너 남경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직까지 양자강 이북은 원나라의 지배력이 강하게 미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강남지방이 농업의 중심으로서 식량문제 등을 해결하는 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원장이 강남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잇을 무렵, 주변에는 장사성, 진우량 등이 이끄는 다른 여러 세력이 활동하고 있었다. 각 세력들은 원나라에 대항하는 싸움과 아울러 그들 사이에도 주도권을 둘러싼 치열한 싸움을 치러야 했다.


원나라는 많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금방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 원은 제국의 존립을 위협하는 반란세력들에게 총공격을 가했다.

 

원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되어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몰락 진적에 이르게 된 홍건적군은 강남의 주원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주원장이 군대를 이끌고 홍건적군에 이르기도 전에 홍건적은 원나라에 의해 타격을 입고 무너지고 말았다.


홍건적이 원의 공격으로 무너진 뒤 주원장은 남경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던 진우량, 장사성 등과 힘겨운 싸움을 계속했으며, 무수한 전투 끝에 마침내 그들 세력을 격파하고 양자강 유역을 완전히 자기의 세력 밑에 둘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반란세력 중 소주에 자리잡고 있던 장사성 세력이 강대했는데 장사성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인 호주는 주원장의 고향이기도 하다. 1365년 마침내 장사성 세력을 격파하고 고향에 들렀을 때 그는 고향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고 한다.

 


"고향을 떠난 이후 10여년, 어려운 싸움들을 했고 마침내 부모의 무덤과 고향의 어른들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오래도록 함께 머물러 즐기지 못하는 것이 섭섭합니다. 어르신께서는 자제들에게 효도와 농사에 전념케 하시고 멀리 떠나 상업에 종사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아직도 세상에는 도적들이 날뛰고 있으니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그가 장악한 소주, 항주, 복건, 강서 등은 중국경제의 중심을 이루는 지역으로 예로부터 <소주, 호주에 풍년이 들면 천하가 풍요롭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강남의 여러 반란세력을 격파한 후 마침내 주원장은 1368년 남경에서 나라를 세워 '명'으로 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연호를 '홍무'라고 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북경의 원나라를 정벌하는 일만 남게 된 것이다.

 

명나라는 원을 정벌하기 위하여 약25만여 명의 군대를 동원했다. 원나라는 명나라가 공격해오는데도 대항할 계책이 없이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명나라 군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원나라의 수도인 북경에 다가갔고 마침내 원나라 황제는 성을 버리고 떠나기로 결정했다. 원 황제인 순제는 밤에 몰래 북경을 빠져나와 응창부에 머물게 되었으나 그는 그곳에서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치게 된다.


남경을 근거로 명나라를 건국하고 북벌군을 조직하여 북벌에 나선 지 8개월 만에 주원장은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몰아낸 것이다. 주원장은 북경에 입성한 수, 싸우지 않고 북경을 떠나간 원의 마지막 황제에 대해서 "하늘의 명에 따라 싸워서 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높이 받들어 '순제'라는 칭호를 주었다. 승자가 가질 수 있는 여유와 아량이었다.


그후 원의 황태자가 북쪽으로 도망쳐 막북이라는 지역에 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북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몽고족의 중국지배는 1368년에 끝을 맺고, 다시 중국대륙은 100여년 만에 한족에 의해 다스려지게 되었다. 그 땅의 주인이 되돌아온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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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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