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48. 일본원정과 고려의 고뇌
2차 일본원정(1274, 1281년)
1960년 4월, 마산 앞바다에 미제 최루탄이 눈에 박힌 16살 김주열군의 시신이 떠올라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보다 약 700년 전인 1274년, 마산부두에서는 일본정벌을 떠나는 900척의 군단이 출정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려와 몽고의 첫 접촉은 1219년, 평양성까지 쫓겨온 가란족을 함께 물리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후 고려인들은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며 오만불손한 태도를 일삼는 몽고사신들에게 커다란 반감을 갖게 되었다.
때마침 1225년 교만한 몽고사신 저고여가 공물을 싣고 귀국하던 중, 압록강변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 몽고는 이를 문책한다는 빌미로 고려 침략을 개시했다.
1231부터 1258년까지 몽고는 6차에 걸침 대전투 외에도 크고 작은 침탈을 끈질기게 계속했고, 그에 맞선 고려인민들의 30년 항쟁은 세계 역사상 매우 드문 것이었다.
몽고의 초토화 작전에 따라 전국의 국토는 남김없이 유린되어 폐허가 되었고, 그 속에서 황룡사 목탑 등 귀중한 문화재인들 안전할 수가 없었다.
강화의 무신정권이 무너진 후, 고려왕실은 몽고에 굴복, 이후 약 100년간 우리는 몽고의 간접지배를 받게 되었다.
몽고의 공주와 결혼하여 몽고왕의 사위가 된 후에야 즉위할 수 있었던 고려왕의 이름 앞에는 '충'자가 붙여졌다. 엄청난 공물이 요구되고, '결혼도 감'이 설치되어 고려의 여자까지 몽고에게 공물로 부쳐졌다.
왕은 몽고옷을 입고, 머리 주위를 둥글게 깎고, 중앙의 머리만을 땋아 길게 늘어뜨린 변발을 했다. 몽고의 풍습은 상류사회에 먼저 유행, 시간이 흐른 뒤에는 민간에도 깊이 침투, 전통문화는 크게 변질되었다. 족두리도 몽고의 풍숩이었고, 목마장이 설치되었던 제주도에는 몽고어의 잔재가 지금까지도 크게 남아 있다.
몽고의 수탈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죽음이 그를 제약할 때까지 평생 정복전쟁을 계속했던 쿠빌라이는 일본원정을 계획했고, 그 방법은 몽고의 전쟁방식, 피정복민을 방패막이로 삼는 대리전이었다. 몽고는 고려를 기지로 삼아 일본원정을 감행했고, 이 대리전을 통해 고려의 국력은 더욱 피폐해졌다.
1274년 1차 일본원정을 위해 고려는 9백 척의 병선, 무기, 군수품등 모든 물자를 담당해야 했다. 이때 병선 공사의 감독관은 홍다구. 그는 고려인들의 증오의 표적이었으며, 때문에 그는 더욱 알랄하게 고려인들을 채찍질했다. 그의 아버지 홍복원은 구려 국경 수비대장으로 몽고의 침입 때 가장 먼저 항복, 침략의 앞잡이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마침내 몽고군 2만과 고려군 5천으로 구성된 일본원정군은 마산항을 출발, 대마도와 이키를 소탕하고, 하카타 만의 이마즈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
정벌군은 화약으로 만든 대포, 석화시 등 신예무기를 동원, 일본무사들을 혼비백산케 했다. 이윽고 밤이 되고, 야습을 걱정했던 원정군은 함선에 올라 아침을 맞기로 했다. 그러나 이것이 결정적인 실수. 때마침 불어닥친 폭풍우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원정군은 철수하게 되었다.
1281년 2차 원정이 감행되었다. 이번에도 고려는 9백 척의 병선제조를 강요받았다. 몽고군 10만과 고려군 4만은 다시 하카타 만에 도달했다. 그러나 또다시 몰아닥친 태풍으로 정벌군은 일본땡에 상륙도 못한 채 퇴각했다.
2차에 걸친 원정으로 고려의 국력은 더욱 피폐해갔고, 일본으로부터는 침략자의 난인이 찍혔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준 폭풍우를 '신풍' 즉, 가미가제로 부르면서 스스로를 '신의 보호'를 받는 국민으로 자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일본인들을 구해준 것은 베트남, 자바 등지에서 벌어진 끈질긴 대몽항쟁이었다. 3차 일본원정을 준비하고 있던 쿠빌라이는 일본으로 향할 병력을 이쪽으로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베트남은 남과 북에 각기 점성국과 대월국이 있었다. 1283년 원군은 해로로 점성국을 함락시켰으나, 그 선단은 폭풍으로 괴멸되었다.
다시 증원된 선단도 역시 폭풍으로 괴멸, 원군은 대월에 대해서 '길을 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화가 난 쿠빌라이는 1284년 말부터 4년간 계속해서 대군을 증파, 역시 순식간에 수도 하노이를 점령했다.
그러나 동남아의 무더위와 저습지에서는 몽고의 날랜 기병도 힘을 잃었고, 베트남 인은 고향의 익숙한 산천지리를 적절히 이용, 끈질긴 저항을 펼친 끝에 마침내 원군을 격퇴시켰다. 이때 저항군을 지휘했던 이가 왕족 진흥도, 그는 오늘날 까지 민족적 영웅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국내에서는 계속된 원정에 반대하는 소요, 카이두 계의 반발도 끊이지 않았다. 이어 1292년에는 자바가 입공을 거절하고 나섰다. 자바에 사륙한 원군은 역시 쉽게 왕도를 점령했으나, 민간의 끈질긴 항쟁 속에 아무 전과 없이 철수해야만 했다. 패보가 계속되는 가운데 쿠빌라이는 1294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세계사적 시각에서 볼 때 우리 나라와 일본, 중국은 다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한다. 그 문화의 원류는 중국에서 시작한 것이 많고, 우리 나라나 일본은 중국의 문화를 각기 주체적으로 소화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어왔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중국의 실력을 항상 피부로 느끼며 생활해왔던 것이 비해, 일본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좀더 여유있게 중국의 문화를 조명할 수 있었다.
'알쓸신잡 > 중국사 100장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사 100장면 - 52. 한족, 다시 중국 대륙의 주인으로. 주원장의 명 건국(1368년) (0) | 2021.04.10 |
---|---|
중국사 100장면 - 51. 징기즈간의 후예에 맞선 한족. 홍건적의 난(1351년) (0) | 2021.04.07 |
중국사 100장면 - 50. 희곡과 소설의 개화. 원대 서민문화의 발달(13~14세기) (0) | 2021.04.02 |
중국사 100장면 - 49. 마르코 폴로의 중국여행.<동방견문록>의 완성(1299년) (0) | 2021.03.30 |
중국사 100장면 - 47. 약탈자에서 지배자로. 원 왕조의 성립(1271) (0) | 2021.03.21 |
중국사 100장면 - 46. 초원의 폭풍 칭기즈칸. 몽고의 유라시아 제패(13세기) (0) | 2021.03.20 |
중국사 100장면 - 45. 여진족의 화북 지배. 북송의 멸망(1127년) (0) | 2021.03.14 |
중국사 100장면 - 44. 송, 중국회화의 황금시대. 문인화의 세계(11~13세기) (0) | 2021.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