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44. 송, 중국회화의 황금시대
문인화의 세계(11~13세기)
어느 서양 성악가가 판소리 공연을 관람한 후에 하는 첫마디가 '저 사람 화났습니까?'였다고 한다. 아무리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서구식 가치기준에 의존하는 정규 학교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은 음악이든 미술이든 우리 문화, 혹은 동양의 문화보다 서양의 것에 더 익숙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나라의 회화사에 카다란 영향을 키쳐왔던 중국의 회화는 송대에 그 황금기를 맞았다. 흔히, '당시 송화'라고 표현하듯이. 화원, 사대부, 재야 직업화가들이 대거 활약했다. 송대의 국립 미술기관 한림도화원은 중국 화원 사상 가장 완벽한 화원제도로 평가 받으면서 훌륭한 화원들을 낳았다.
사대부 화가들은 어디까지나 사대부 계층의 취미생활로서 그림을 즐겨 그렸는데, 그들 사이에서는 전문화원의 그림과는 구별되는 이른바 '문기어린' 그림이 강조되었다.
송대에는 점차 불교가 쇠퇴하면서 조각에 쏟아졌던 중국인들의 예술적인 정열이 회화로 옮겨지게 되었다. 왕실의 궁정화가에 의해, 혹은 종교의 부속화로서 종속되어 있던 하나의 독립된 예술분야로 정착, 높은 예술성을 획득하고 있었다.
특히, 화가의 주관적인 가치를 담아냈던 문인화는 송대 회화의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다. 좁은 의미의 문인화란 사대부의 의취를 담은 매란국죽의 사군자화를, 나아가서는 사대부들이 그린 그림 일체를 일컫는다. 사군자는 사대부들에 의해 즐겨 그려졌던 주제이며, 화원의 시험에서도 대나무 그림의 배점이 제일 높았다.
문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는 소동파와 문동이다. 특히 소동파는 직업적 화가들이 기교를 중시하고 실제의 대상을 얼마나 닮게 그리느냐에 치중한다고 보고, 사대부들은 그와 달리, 눈앞의 현상보다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은 다음, 다시 그것을 초월하여 흉중의 뜻을 담아내야 한다고, 이른바 '문기어린'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적벽부의 문장으로 더욱 알려지고, 대대로 짝사랑을 아낌없이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러한 주장이라면, 일찔이 고개지도 회하를 논하면서 이른바 전신, 즉 정신을 전하는 것을 회화가 추구해야 할 사명으로 예기한 바 있다.
가령 대나무를 그린다면, 마디로 분절해서 치밀하게 그리는 거이 아니라, 대나무를 깊이 관찰하여 그 본질을 마음에 담아낸 다음, 땅에서 가장 꼭대기까지 한 획으로, 그 속도가 마치 '토끼가 튀는 듯, 솔개가 급강하하면서 덮치듯이'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사대부들은 그림을 즐겨 그리면서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군자로서 정신적인 수양을 위한 하나의 세련된 여가생활이었지, 그림을 전문으로 하는 화업은 여전히 천기로 취급하고 있었다.
당초기의 염립본은 대신급 고위관료였는데, 그림을 잘 그리기로 유명했다. 어느 날 왕과 동행, 놀이를 나갔는데, 왕이 명하여 모두들 노는 자리에서 엎드려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후 그는 '화기는 천기'라 하여 붓을 꺾어버렸다고 한다.
특히 송대에서는 산수화가 독보적인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송대에 도시가 널리 발달, 도시적 분위기가 성숙해지자 사람들에게 자연미에 대한 각성이 새롭게 다가왔을 것이며, 그간의 불교, 도교의 자연에 대한 애착 등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동양의 산수화, 즉 풍경화는 사의를 강조하는 까닭에 흔히 '동양화는 읽는 그림'이라고도 하고, '시는 소리있는 그림이요, 그림은 소리없는 시'라는 표현도 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좋은 시에 붙여 그림을 그리고, 좋은 그림에 돌려가며 감상을 쓰는 것은 일반적인 것, 그 속에 사대부들의 한가로운 아취가 담뿍 담겨지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합은 이 둘이 먹과 붓의 동일한 도구를 사용했기 때문에 더욱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흔히 동서양의 풍경화를 비교하여, 그들의 상이한 자연관이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동양인이 자연의 내재적 질서를 중시하고 그 '운동태'를 중시해서 선적인 미술을 창조했다면, 서양인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파악, '존재태'를 중시함으로써 면적 미술을 창조했다.
서양화에서는 한 화면에 하나의 시각만이 존재하고, 또 하나의 시간만이 존재하는 반면, 동양화에는 여러 개의 시각과 시간의 경과까지도 표현되고 있다. 예컨대, '끝없는 강산' 같은 유의 화폭에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주제의 표현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중국의 산수화에서는 근경, 전경, 원경이 잘 구분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근경은 위에서 내려다본 시각이고, 전경은 옆에서 본 시각이며, 원경은 아래에서 올려다본 시각을 잡았다. 서양사람들이 자연보다 인간이 중심이 되고, 그것도 개인의 시점에서 자연을 표현했다면, 동양사람들은 자연을 위주로 해서 인간이 거기에 시각을 맞추고 있다.
안견 이래 우리 나라의 화단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곽희는 전문 화원 출신으로, 북송기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고개지 이래 7백년의 뛰어난 화론을 이룬 평론가였다. 그는 자신의 화론을 담은 <임천고치>에서 말하기를,
"산은 가까이에서 보면 이와 같고, 멀리 몇 리 밖에서 보면 또 이와 같으며, 멀리 수십 리 밖에서 보면 또 이와 같다. 매번 멀어질수록 매번 다르니, 산의 모습은 '걸음걸음마다 모두 돌아 보지 않으면' '천 개의 산'을 '두 눈으로 빼앗을 수' 없다"고 얘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북송의 곽희파, 남송의 마하파의 그림을 비교해보면, 북송의 그림은 여백이 강조되고 부드러운 남송의 그림보다 산봉우리가 꽉 짜여져 있고, 낮은 산이라기보다 준령이 첩첩하며, 습기가 느껴지는 부드러운 느낌보다는 건조하고 메마른 느낌을 준다.
이러한 경향은 화풍의 차이에도 기인하지만 화북과 강남지방의 자연이 이처럼 차이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중국인들은 어디까지나 실경을 그렸던 것인데, 이를 받아들인 우리에게는 가경이되는 것이다. 뒷날, 우리 나라의 화단에 실경을 그리는 화풍이 등장, 이를 '진경산수화'라 부르게 되는 연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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