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40 유목민족의 각성. 최초의 정복왕조 요나라(916~1125년)
중국문명이 탄생한 이래, 중국민족과 북방 유목민족과의 대립은 역사상 중요한 주제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중국의 우위는 확고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말 오대의 변혁기에 이들이 뚜렷하게 각성, 독자적 국가체제를 갖추고 중국을 정복해들어가니, 송대의 중국은 동아시아에서의 정치적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 몽고족의 원으로 이어지는 유목민 정복왕조의 행렬은 중국의 일부, 절반, 끝내는 중국 전역을 송두리째 지배하게 되었다. 천하의 중심으로 자처하던 중국인의 자처하던 중국인의 자존심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며, 잇따른 전쟁 속에서 각국의 민족주의는 크게 고양되었다.
유목민족들은 유라시아 대륙의 내륙부, 건조한 기후대를 따라 목축, 수렵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광대한 초원의 바람소리를 귓가에 들으며 천막 속에서 살았고, 목초지를 따라 계절에 따른 이동 생활을 했다.
이들의 재산이라면 수백, 수천의 양떼와 말에 불과했다. 말은 여름철에 수많은 양떼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했으며, 겨울에는 부족원들의 사냥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먹고 사는 것은 가능하지만 재산은 늘릴 수 없는' 이들의 유목 생활은 언제나 소박했다. 가난은 주변 농경민족으로부터 생활필수품을 약탈하게 했으나, 성원간의 평등한 관계를 유지시켜줌으로써 그들의 부족 내부는 견고하게 단결되어 있었다.
중국 최초의 정복왕조가 되었던 거란족의 건국설화를 살펴보자.
<그 옛날, 흰 말을 탄 신인이 토하(랴오허 강) 상류로부터 내려고, 검은 소달구지를 탄 선녀가 황허(시라무렌 강)의 상류로부터 내려왔다. 마침내 두 남녀는 두강의 합류점인 목엽산 기슭에서 만나 부부가 되었고, 아들 여덟을 두었는데, 이들이 각각 거란 8부의 조상이 되었다.>
거란족은 만주 시라무렌 연안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몽고계의 종족으로 8개의 대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목민족인 그들에게 말이나 소는 매우 중요한 동물이었을 터이고, 아마도 수말과 암소를 토템으로 하는 씨족의 족외혼으로 결합하여 국가를 건설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과의 접촉기에 강성했던 두 성씨, 즉 야율 성과 심밀 성은 각기 말과 소를 상징하는 씨족명의 한자 표기어다.
916년 부족연합의 대칸이었던 야율 성의 아보기가 세습적인 지위를 확보, 전제국가 체제를 갖추고 '대거란국'을 건설했다. 아보기는 926년 만주에 200년간 군림했던 해동성국 발해를 멸망시키고, 몽고지역을 제패했으며, 그를 이은 태종은 석경당의 후진을 후원, 이른바 연운 16주를 얻고, 937년 국호를 '대요'라 했다.
거란족, 즉 '키타이'의 위력은 주변에 진동하여 러시아 말의 키타이는 중국의 호칭이 되었다.
연운 16주는 만리장성 남쪽, 즉 북경과 대동을 중심으로 한 화북의 일부 지역으로 이 중원의 땅이 이민족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은 중국인들로서는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통일을 완성한 송태종은 이 실지의 회복을 위해 여러 차례 북벌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거란족은 농경민으로부터 단순히 물자를 약탈하는 차원에서 이미 벗어나 있었다. 약탈보다는 농업이나 수공업 기술자의 획득에 치중, 국력을 다져가고 있었다. 장성 이북의 유목지대에도 많은 도서적 집락이 만들어졌고, 그 가구 수는 연운지방의 호수에 필절하는 것이었다.
거란의 국력은 6대 성종 대에 이르러 최고수준에 달했다. 성종은 송의 영토를 향해 남하를 거듭, 송의 조정에 위기감을 조성했다.
송의 조정에서는 천도론까지 대두했으나, 재상 구준이 끝까지 싸울것을 주장, 진종의 친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황하를 사이에 두고 요군과 대치하게 된 진종은 전쟁터가 가까워질수록 두려움에 떨며 일말의 전의도 없이 화의만을 모색할 뿐이었다.
한편, 보병 위주의 송군은 초원의 야전에서는 기마병인 요군을 당해내지 못했으나, 성을 거점으로 싸울 때는 완강한 저항력을 보였다.
때마침 송과의 교전에서 명장을 잃을 요군은 사기의 하락을 우려 화의에 응하게 되니, 이것이 이른바 '전연의 맹', 1004년의 일이었다.
이 조약에서 송은 형의 나라라는 명분은 얻었으나, 요에게 연운 16주의 지배를 인정하고,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바치기로 했다. 이것은 빈번한 전쟁보다는 나은 차선의 선택이었다고 했으나, 다른 유목민족들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선례가 됨으로써, 송의 국력은 크게 피폐하게 했다.
진종은 자신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하늘이 내린 글을 위조하여 봉선례의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했으나, 비용만 더욱 소비되었을 뿐, 송의 실추된 권위는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요나라는 장성 이날의 화북 농경지대에는 한인 관료에 의한 중국식 행정을 유지시킴으로써 장성 이북의 유목지대와는 다른 이원적 지배체제를 취했다. 이른바 북면관, 남면관이 그것이다.
또한 불교를 도입, 중국인과 거란인의 일체화를 도모했다. 대장경의 간행 등 발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불궁사 석가탑은 중국 내에 현존하는 최고의 목탑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요나라의 중심은 명백히 장성 이북의 유목지대였으며, 그곳에서 거란족 독자의 체제를 구축, 중국에 대한 이민족 의식을 뚜렷이 하고 있었다. 그들의 민족의식은 위구르 문자를 계승하여 만들어진 거란 문자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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