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38. 문치주의와 군주 독재체재의 확립
송나라의 건국(960년)
907년 황소의 부장이었던 주전충이 당 애제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아 후량을 세운 이후, 중원지역에서는 후당, 후진, 후한, 후주의 다섯 왕조가 이어지고, 그 외의 지역에서는 오, 남당, 전촉, 후촉, 남한, 초, 오월, 민, 남평, 북한의 10국이 할거했다.
960년 후주의 노장 조광윤이 공제로부터 역사상 최후로 선양의 형식을 밟아 송을 건국하기까지의 50여년간을 우리는 5대, 혹은 5대 10국 시기로 지칭한다.
중국 최후의 대분열기였던 이 시기는 무장들의 혁명으로 점철, 가히 지방적 할거의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로, 왕조사적인 시각을 굳이 고집하지 않는다면, 이미 당말의 연장선상에 있는 시기였다. 때문에 우리는 흔히 이 시기를 당말오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정치사적인 입장에서는 혼란기였음에 틀림없었고, 중국의 분열을 맞아 북방 유목민족들이 두드러지게 흥기,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불리한 조건이 마련되고 있었다.
오대의 여러 왕들 중에도 유목민족 출신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돌궐 출신으로 후진을 세운 석경당을 후당과의 대결에서 거란의 힘을 빌린 후, 거란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북방의 연운 16주를 떼어 바침으로써 유목민족의 중국 지배의 서단을 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으며, 절도사 등 지방세력의 할거 속에서 위진 이래의 문벌귀족들이 대거 몰락, 송대의 새로운 사회가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던 중국사회의 구조적 변혁기였다.
이 시기가 낳은 가장 흥미있는 인물로, 풍도라는 정치인이 있다. 그는 5대 중 4대에 걸쳐 정계의 원로 자리를 지켰는데, <장락로서>라는 저술을 통해, '아침에는 진나라에 벼슬하고, 저녁에는 초나라에 벼슬했던' 자신의 생애를 자랑스럽게 술회했다. 장락로란 그가 스스로를 칭했던 이름이다.
후주의 명군 세종이 직접 진두 지휘하여 군사 강국인 북한과의 결전에 나섰다. 그때 중대한 고비마다 언제나 알쏭달쏭한 태도를 취하던 풍도가 갑자기 튀어나와 이를 만류하고 나섰다.
'당태종께세도 친히 전선에 나가 천하를 평정하지 않았던가? 집은 궁중에 편안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소.'
'폐하께서 과연 당태종과 같다고 생각하시옵니까?'
'짐의 군사를 보오. 유숭 따위는 우리 군사 앞에서는 계란으로 산을 치는 것과 같은 것이오'
'폐하의 힘이 과연 산과 같을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세종은 끝내 출진하여 북한군을 격퇴했고, 풍도는 완전히 자신을 잃고 그해에 병사했다. 세종은 처음 10년간은 천하를 평정하고, 다음 10년간은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마지막 10년간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한다는 통치 청사진 속에서 천하통일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는 내정에 충실을 기하고, 거란을 공격하여 연운 16주의 일부를 회복하는 등 눈부시게 활약했으나, 재위 6년 만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그가 뿌린 통일의 씨앗을 거두어들인 자는 송태조 조광윤이었다. 세종이 죽고 그의 아들 공제가 7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당시 금군 사령관이었던 조광윤이 쿠데타를 일으켜 황위를 찬탈, 송 왕조를 개창했다. 중국의 통일은 다음 대인 태종 때, 즉 979년 북한을 쓰러뜨림으로써 완성되었다.
집권에 성공한 송 태조가 맨 처음 착수한 일은 군벌의 제거였으며, 이로써 송대의 문치주의의 전통도 윤곽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셈이다. 본인 자신이 절도사 출신이었던 태조는 군벌의 생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여전히 지방에 잔존하는 군벌의 존재는 그에게 커다란 위협이었고, 그는 군벌의 제거라는 최대의 현안에 정면 승부를 걸었다.
어느 날, 태조는 자신을 추대해주었던 석수신 등 장군들은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그대들이 아니었던들 짐은 도저히 황제가 될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황제의 자리도 그리 즐거운 것만은 아니어서, 밤에도 안심하고 잠을 이룰 수가 없소'
석수신 등은 당황해서 그 이유를 물었다.
'황제가 되고 싶지 않은 사나이가 어디 있겠는가?'
'폐하,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폐하의 지위는 이미 하늘이 정한 것이오니 여기에 이론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알고 있소. 여기에 있는 경들이야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지만, 경들의 부하 가운데는 더 출세하고 싶어하는 자도 있을 것이오. 만약 경들의 부하가 왕관을 내밀면 어떻게 하겠소. 고개를 저을 까닭이야 없지 않겠소?'
다음날 석수신을 비롯한 장군들은 모두 중병이라는 이유로 자진해서 군사에 손을 떼고, 군대의 통수권을 태조에서 넘겼다. 어찌됐는 태조는 당태종만큼이나 고도의 정치력을 구사했던 인물로 평이 나 있다.
태조는 이들을 지방의 한직으로 좌천시켰으며, 그들의 군대를 중앙의 금군과 지방의 상군으로 재편, 군대의 통수권을 장악했다.
아울러 재상권을 약화시키고, 군정, 민정, 재정을 분담, 각기 추밀원, 중서성, 삼사에서 관할하게 했다. 당시 로, 주, 현의 지방제도에서 모든 단위의 지방관은 모두 문관 출신으로 황제에 의해 임명되었다.
지방에서도 역시 모든 관료들의 권한은 분산되었다. 가령, 주의 장관인 지주도 차관격인 통판이 재정권을 관장하게 됨으로써 주의 모든 권한을 장악할 수 없었다.
모든 관리의 권한은 철저히 분산, 제한되어 제도로서 확립되었다. 또한 이 모든 것은 황제권의 강화로 귀결, 송대의 황제의 독재적 권력을 그 어느 시기보다 안정된 위치에 자리하게 했다.
한편, 수요가 크게 늘어난 문신관료들을 과거로써 선발하게 됨에따라, 과거는 수나라에서 처음 시작된 지 수백년이 경과한 송대에 비로소 정착하게 되었다.
특유의 유교적 학식으로 단련되고 과거를 통해 전제 황권과 절묘하게 결합한 신흥 사대부들은 전통 귀족들과는 달리, 비록 당쟁은 했을망정 황제권을 넘보지는 않게 되었으니, 사대부 관료의 보좌 속에 송대의 전제 황권은 더욱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학자적 관료가 사회를 주도하는 문치주의의 전통이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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