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36. 소금 장수 황소. 황소의 난(875-884년)



881년 1월 8일 이른 아침, 대당의 수도 장안에서는 잠시나마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장안성의 서문으로는 황제 희종의 피난행렬이 허둥지둥 줄행랑을 치고 있었고, 동문으로는 반란군의 수령 황소가 금으로 장식한 수레를 타고 위풍도 당당하게 입섭하고 있었다.


성문을 지키던 친위부대조차 이미 전의를 상실했고, 장안의 백성들은 조수처럼 길 양쪽에 밀려들어 환호성을 지르며 황소의 군대를 환영하고 있었다.


환영나온 백성들을 향해 황소의 부장 상양이 큰 소리로 외쳤다.


'황왕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오로지 백성들을 위한 것. 당왕조와는 다르다. 백성들을 절대 학대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안심하고 각자의 생업에 힘쓰라!'


반란군은 엄정한 군기를 지켜 민폐를 끼치지 않았으며, 장병들은 가난한 백성들을 보면 의복과 금품을 나누어주었다. 이들도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황소군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날 백성들의 눈에 비친 반란군의 모습은 해방군의 그것이었으며, 백성들은 그들이 자신들을 당왕조의 가혹한 지배로부터 탈출시켜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황소는 스스로 황제가 되어 백성들 위에 군림했고, 창졸간에 장안을 빼앗긴 귀족들도 다시 세력을 정비, 장안을 탈환하게 되니, 이들은 다시 백성들에게 반군에 협조했다는 죄목을 씌어 살인, 방화, 약탈 등의 보복을 자행했다.


반동군에 되밀린 황소군은 후퇴하면서 금은보화를 길바닥에 뿌리는 작전을 폈다. 관군은 다투어 이를 줍기에 정신이 없었고, 황소는 이 틈을 타서 군대를 가까스로 이동시켰다. 


반란군은 다시 최초의 봉기 때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게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해서 관군의 토벌을 어렵게 했다. 이들의 엄청난 조직력과 금력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소금이었다.


19세기 중국을 방문한 서양 사람은 중국의 소금 값이 엄청나게 비싼 것에 놀랐다. 중국에서는 소금 산지가 일정 지역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독점할 수만 있다면 엄청난 부가 보장된다. 


일찍이 이를 기반으로 국가가 일어나기도 했고, 소금을 쟁탈하기 위해 전쟁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특히 한 무제 이후 정부에서는 이를 전매함으로써 부족한 재정을 메우고 있었다.


당나라도 안사의 난 이후 소금 전매에 의존, 극심한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했다. 실로 소금 전매수입은 총재정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전매 이전에는 한 말에 10전 하던 소금값이 110전으로 오르더니, 급기야 300전에 달했다.


소금이 인간 생존의 필수품인 이상, 그 가장 커다란 피해자는 물론 농민들이었다. 안사의 난 이후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당의 궁중에서는 다시 독버섯처럼 환관들의 세력이 자라나 허약한 황실을 쥐고 흔들어대니, 황제는 이들에 의해 세워지고 폐해졌다. 그 속에서 농민들의 시름은 더욱 깊어져, 당말에 이르면 거의 목불인견의 참상을 보였다.


살 길이 막혀버린 농민들은 포악한 관리들을 습격하여 울분을 표시하거나, 부유층의 물산이 집산하는 농촌의 초시를 약탈하는 등 산발적인 저항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를 전국적 대봉기로 이끌어내는 데 소금밀매 조직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소금값이 급등하게 되면 자연히 암거래가 생겨나고, 점차 그들의 비밀결사가 결성된다. 정부는 비밀경찰을 동원, 이들을 추적하고, 추적망에 걸린 자들에게는 사형 등 중형으로 가혹하게 처리한다. 이렇게 되면, 소금 밀매조직들은 보다 적극적인 자위책을 찾아 무장봉기의 길에 나서게 된다.


875년 봉기의 선두에 나선 황소와 왕선지는 하남성 접경에 가까운 산동성, 교통이 편리한 황하 연변에서 사염 밀매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여러 차례 과거시험에 낙방한 후 봉기를 결심하게 되었다. 즉각적으로 실업자 농민 수만 명이 가세하고, 북방의 돌궐, 위구르 출신 전문 병사들이 가담했다.


광범한 농민병사의 지지 속에 이민족 군인의 전투력, 비밀결사의 조직력과 자금력이 결합했으니 반란군의 기세는 참으로 대단했다. 이들은 전국적 조직을 이용, 일정 거점을 두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작전을 폈고, 때로는 동시에 여러 주를 공격하는 위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황소군에게 치명적이었던 것은 주온의 배신이었다. 그는 사태를 저울질하다가 당왕조 쪽으로 자리를 바꿔섰는데, 이러한 지도층의 한계는 주온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황소도, 왕선지도 그랬다. 이들은 자신에게 고위관직이 확실하게 보장만 된다면 언제든지 농민들을 저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황소는 자신의 부장이었던 주온과 터키계 사타족의 수장 이극용 군대와 맞서 싸웠으나, 마침내 호랑곡 전투에서 참패, 자결로써 일생을 마쳤다. 그때가 884년. 황소의 난으로 불리며 10년간 전국을 들끓게 했던 농민 대봉기는 비틀대는 당왕조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면서 또다시 이렇게 좌절되었다.


당왕조는 주온의 공을 인정, 요직을 주고 전충이라는 이름을 새로 내렸는데, 그가 장차 290년간의 당왕조를 멸망시킬 인물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주전충은 907년 당의 마지막 황제 애제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즉위, 후량을 세움으로써 5대 10국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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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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