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34. 균전체제의 붕괴

양세법의 실시(780년)


중국의 농민들은 그 최초의 국가가 발생한 이래, 오로지 그 나라에 백성된 의무로서 국가가 필요로 하는 모든 물자와 노동력을 제공해왔다. 고대로 거슬러올라갈수록 노동력의 수탈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특히 농민들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는 것은 병역이었다.


중국에서 최초로 발달한 법은 율, 즉 형법이었다. 이것은 국권에 도전하는 반란 세력에 대응하는 조처인 한편, 농민들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저항한 농민은 노비로 팔려가게 되거나 잔인한 죽음을 맞거나, 혹은 신체의 일부가 잘리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율에 이어 행정법인 령이 제정되고 한대 이래 정비되었던 율령 제도는 국가통치의 기본지침이 되었다. 


수나라 때 일종의 임시법인격, 시행세칙을 담은 식이 가미, 이른바 율령격식의 체제가 마련되었다. 흔히 당을 율령국가로 일컫는 것을 율령이 그때 가장 완결적 모습으로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당의 율령체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균전제이다. 균전법은 령에 규정, 624년에 처음으로 공포되었는데, 균전법이란 이리 북위 이래의 토지제도였다. 그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것이지만, 그 기본적인 틀은 같다.


국가는 평민의 성인 남자들에게 삶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토지를 고르게 분배한다. 농민들은 그 대가로 국가운용에 필요한 모든 것, 즉 조용조의 세역과 병역을 제공한다. 


조용조의 세역이란 곡물, 노동력, 지방 특산물을 제곡하는 것이다. 또한 농민들은 농한기에 군사훈련을 받고, 유사시에는 군대의 병사로 충당되었다.


근래에 발굴된 '돈황 고문서' 등은 균전제가 일부지역에서 적어도 문서상으로는 불완전하나마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중국의 왕들은 주나라 때 시행되었다는 정전제를 이상으로 삼아, 토지의 고른 분배를 꿈꾸고 있었으나, 사회주의 혁명 이전의 어느 시기에도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된 적은 없었다. 


춘추전국 시대에 토지의 사유화가 시작된 이래 진한대에는 이미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고 있었다. 동중서는 이미 '부자의 밭두둑은 연달아 있고,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한시대부터 토지의 상한을 정하는 한전법 논의가 나오기 시작했으나, 그 시도는 언제나 실패했다.


균전제도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를 부정했던 것도, 국가가 토지를 소유, 개인에 대한 토지의 수여와 회수를 전적으로 주관했던 제도는 아니었다. 


균전제 역시 국가의 토지제도의 이상을 관념적으로 반영한 형태였으며, 단지 국가의 공권력이 강성했을 때에는 귀족들의 부당한 대토지 확대를 어느 정도 견제하면서 농민들의 토지 안착을 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사의 난 이후 당의 지배체제가 급격히 무너지고, 절도사 등 지방의 군벌이 크게 대두하기 시작하자 농민들의 유망, 전호화, 사병화 추세가 격증, 국가의 재정수입은 커다란 타격을 받게되었다. 이의 타개책으로 새로이 등장한 것이 양세법이다. 


그러나 양세법은 종래에 국가에 의해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포기되지 않았던 평등의 원리에 기초한 율령 지배체제를 공식적으로 포기하는 것으로, 중국사회의 질적인 전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제 세금은 농민이 아니라 토지에, 고르게 부과되는 것이 자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개인이 아니라 가구별로 배당되게 되었다.


국가는 엄청난 재산의 격차를, 대토지 소유제를 처음으로 공식 인정하게 되었다. 이제 한전법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게 되었고 지주제는 국가의 제한 없이 발전하게 되었으니, 송대의 지배적인 지주-전호제의 싹은 여기서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양세법은 780년 재상 양염의 건의로 처음 시행되었다. 농민들의 직역이나 요역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세금은 토지, 혹은 상업소득에 대한 재산세로 일원화되었다. 


국가는 세금수입으로 직업군인을 양성하게 되었다. 농민의 인신 수탈에 보다 크게 의존했던 율령국가에서 점차 재정국가로 이행하고 있었다. 아울러 농민들의 지주, 국가에의 예속관계는 보다 경제적인 것으로 바뀌어갔다.


사회는 점차 경제가 더욱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었다. 양세법이라는 명칭은 세금을 보리의 수확기인 6월과 쌀의 수확기인 11월, 두 차례에 걸쳐 징수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인데, 이것 자체가 당시 경제발전을 반영하는 것이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일년에 한 번 수확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상업은 더욱 발달하고 그에 따라 화폐경제도 더욱 발달하게 되니 장차의 새로운 시대가 예고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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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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