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30. 전무후무한 여황제 측천무후
무주혁명(688년)
신라와 연합, 숙적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장본인,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릉인 건릉의 앞에 비석 두 개가 서 있다. 하나는 고종의 비로, 비문은 측천무후가 찬하고 중종이 해서로 썼다.
그런데 다른 하나, 무후의 비에는 어찌된 이유인지 아무런 글씨가 씌어 있지 않다. 이 비가 '무자비'가 되었던 이유에 대해서 혹자는 무후가 너무도 높고 큰 자신의 공덕을 표현할 글을 찾지 못한 까닭이라고도 하지만, 그녀가 죽은 다음, '찬탈'틔 경력을 넣지 않고는 기록할 수 없는 그녀의 비문을 섣불리 지을 수 있는 신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비석들은 현재 섬서성 박물관의 비림-비석의 숲-에 옮겨져 있는데, 고종비는 여러번 부러져 그 흔적이 남아 있지만, 무후의 비는 단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사에서 측천무후처럼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여성은 없다. 그녀는 현종의 할머니로 '개원의 치'로 불리는 현종 전반기의 번영의 기초를 쌓은 여걸이며, 무엇보다도 중국사에서 전무후무한 최초 최후의 여황제였다.
일찍이 중국사에서 들먹여지는 여성들은 대개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 혹은 (여자와 술은 가까이하면 안된다)는 식의 유교적 여성관에 적용되는 경우였다.
그녀들은 조비연처럼 왕의 손바닥 위에 올라갈 듯이 가녀린 모습이거나, 양귀비처럼 풍만한 모습이거나 상관없이, 빼어난 미모로 왕의 정신을 흐리게 하여 정치를 어지럽게 했다. 급기야 은이나 서주 같은 나라의 몰락 뒤에는 달기와 포사라는 여인이 있었다라는 식으로 얘기되는 것이다.
때로 정치적 영향력을 구사했던 여후나 서태후 같은 여성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어린 아들의 뒤에서 섭정이라는 형식을 취해 왕의 후광 뒤에 숨어 있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나 측천무후는 실력자로 부상, 고종과 함께 '2인 천자'로 불리었던 유례없는 예우에도 만족치 않고 스스로 황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나라 이름을 '주'로 정하고, 아들 예종도 자신의 성 '무'씨를 따르게 했다. 이를 무주혁명이라고 부른다.
측천무후의 이름은 무조, 그녀의 아버지는 고조의 거병에 협력했던 지방의 목재상이었다. 그녀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이름없는 궁녀로서 궁중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타고난 미모와 총기, 당당한 자태로 곧 태종의 눈에 들어 그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뒷날 고종이 된 태종의 9째 아들 이치는 일찍이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고, 아버지 태종이 죽은 다음 그녀를 비구니로 만들었다가 다시 궁중에 불러들여 총애했다.
소의가 된 그녀는 소숙비, 왕황후를 차례로 누명을 씌워 살해하고,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때가 32세. 말단의 궁녀에 불과했던 그녀의 새로운 이름은 측천무후였다.
고종은 병약하고 우유부단한, 극히 평범한 인물로 왕의 재목으로는 부족함이 많았는데, 바로 이 점이 구귀족들의 눈에 들어 황제로 추대되기에 이르렀다.
태종은 신구귀족의 균형 속에 강력한 황권을 구사했고, 구귀족들은 항상 이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황후 소생의 세 아들 중, 첫째는 동성애를 이유로 황태자에서 폐위되었고, 태종을 닮아 매우 유능하고 야망에 차 있던 둘째를 제치고 이치가 바로 범상하는 이유 때문에 즉위하게 된 것이다.
황후가 된 측천무후는 고종의 지병인 간질병을 이유로 정치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뛰어난 정치력으로 차츰 고종을 능가하여 최고의 실력자로 떠올랐다.
스스로 명문가 출신이 아니었던 그녀는 구귀족에 대한 냉혹한 숙청을 서슴없이 감행했고, 과거출신의 능력있고 한미한 가문의 개인들을 대거 관리로 등용함으로써, 황제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공적인 기능을 확대, 국력을 신장시켰다.
최근 낙양의 당 유적을 복원하던 중, 성 밖의 함가창성 유적에서 수백 개의 땅 속 움막이 발굴되었다. 이것은 곡물 저장창고로, 낙양은 대운하를 통해 들어온 강남의 미곡이 집산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나온 기록에 의하면, 비축곡량이 가장 충실했던 시기가 바로 측천무후와 현종의 집권기였다. 이것으로 중국 역대왕조의 숙원 사업이었던 고구려의 정벌도 이루어졌으리라.
그녀가 밀녀네 다른 남성 황제처럼 이성 편력도 하고, 도가에 기울어지는 등 혼미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황제로서의 그녀의 역량은 자신의 두 아들(중종과 예종)을 폐위시킨 그녀의 야심을 추하게 보이지 않게 할 만큼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뒤늦게 그녀를 폐출 시키려 했던 고종의 시고는 좌절되었고, 권신들도 속수무책, 그녀가 빨리 노쇠해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705년 재상 장간지 등은 와병중인 그녀를 핍박, 중종을 다시 복위 시킴으로써, 다시 당왕조는 복귀되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 82세.
이후, 중종의 황후인 위씨 등이 그녀를 흉내내어 제2의 측천무후를 꿈꾸었으나, 그 꿈은 다시는 실현되지 않았다.
여황제의 군림은 전통적 한족사회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에, 수, 당 제국의 황실에 유목민족의 혈통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축을 낳았다.
수 양제나 당 고종이 아버지의 비를 취한 것, 도용에 보이는 기마 여인상, 나아가서 제국의 개방적인 문화등도 이에 한몫을 거들고 있다.
실제로 수, 당의 황실은 북조의 명가 출신으로 순수 유목민족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들을 흔히 '관농 집단'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무천진을 동향으로 하고 관농지방, 즉 위하 유역에 거점을 갖고 있었다. 무천진은 선비족의 왕조였던 북위의 토찰 엘리트들의 거점인 6진의 하나였다.
이들 관농 집단의 시조격인 인물은 서위의 우문태로, 그의 자는 흑달(검은 수달), 선비화한 흉노계의 부족 출신이다.
그의 아들 우문각은 마침내 정권을 탈취, 북주를 창건했다. 재미있는 거은 우문태의 협력자로 선비족 최고의 명가를 이룬 독고신이란 존재인데, 그는 장녀를 우문태의 장남에게, 4녀를 북주 최고의 명가인 이병에게, 7녀를 대장군 양충의 아들 즉, 수 문제 양견의 황후로 줌으로써, 북주, 수, 당 3대에 걸친 외척이 되는 기록을 남겼다.
이병의 아들 이연이 바로 당 고조이니, 수양제와 당고조는 이종사촌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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