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27. 대륙의 동맥 대운하의 건설

수나라의 재통일(589년)



후한의 몰락 이후, 분열의 상태가 자그만치 370년간 지속되면서 다시는 오리라 믿기 어려웠던 중국사회의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581년 외척 양견이 북주의 왕위를 찬탈, 수隨나라를 세우더니, 마침내 589년에는 진을 멸함으로써 통일을 완성했다. 그가 수 문제다.


문제는 통일의 힘으로 발휘되었던 백성들의 측정할 수 없는 열기를 토대로 정치에 힘써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특히 당제국의 기초가 되었던 각종 제도들은 바로 문제가 북조의 각 제도를 수렴하고 정비해낸 것들이다.


균전제에 기초한 부병제와 조용조의 세제, 문벌에 의한 9품관인 법에 대신하여 중소 지주층의 관계진출의 길을 연 과거제, 3성 6부의 중앙 관제 등이 실시되었다. 주, 군, 현의 지방행정 조직이 간소화되어 주현제로 정착하게 되었고, 인보제를 실시하여 백성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그의 개혁에는 물론 지방 물벌귀족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다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가 확립되었다. 18년이 경과하자 수의 호적 대장에 등재된 호구수가 400만 호에서 900만 호로 불어났다. 수도 장안의 창고에는 조정이 5, 60년을 족히 사용할 만한 곡물과 피륙이 쌓이게 되었다.


수 양제는 문제의 둘째 아들로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용모와 재능으로 양친의 사랑을 독점했다. 그는 13세에 이미 진왕에 봉해졌는데, 마침내 형 양용을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 일설에는 문제도 그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다 한다.


문제가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면, 양제는 대운하를 개통하여 남북 문물교류를 활발히 함으로써 오랜 남북 분열을 통합하고 통일을 실질적으로 완성했다. 최초로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던 진의 상징물이 만리장성이라면, 수의 중국 재통일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대운하를 꼽을 수 있다.


남북조 이래 강남의 경제적인 중요성은 이미 중원을 능가할 정도로 증대됨으로써 대운하의 완성을 재촉했다. 


특히 양자강 유역의 쌀을 수도인 장안과 동도 낙양 등의 소비도시에 직송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었다. 양제는 대운하의 완공으로 보급로가 정비되자 곧 바로 고구려 대원정을 감행할 수 있었다.


중국의 지형은 서고동저형으로, 주요 강들은 3천미터가 넘는 서쪽의 산지에서 발원, 동으로 흘러간다. 


대운하는 이들 주요 강, 이른바 백하, 황하, 회수, 양자강, 전단강, 즉 5대 강의 하류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605년부터 610년까지 4차의 공기로 나뉘어 건설된 대운하는 북으로 북경, 남으로 항주에 이르는 장장 2천 킬로미터의 거대한 물길이다. 


이로써 실핏줄 처럼 얽혀 있던 각 강의 지류들이 서로 연결, 중국이라는 거대한 몸체를 관류하는 대동맥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관용 수로로 출발했던 대운하를 따라 점차 민간교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활발한 사람들의 왕래는 중국 내 문물의 교류를 더욱 촉진, 사회의 동합을 재촉했다. 


물론 이러한 결실은 거대한 중국의 다른 문물이 그러하듯이 백년쯤 지난 당대에 맺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만리장성처럼 대운하도 역시 그동안 역대왕조에게서 개별적으로 추진되던 것을 통일국가에서 완결을 본 형태이지만, 이 운하의 건설에 바쳐진 백성들의 고통은 대단한 것이었다. 


대운하의 양 언덕에는 죽어나가는 백성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뒹굴었으며,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는 노역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팔다리를 잘라서 복수복족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참으로 고대의 웅대한 문화유산들은 오로지 전제국가들이 무수한 노동력을 강제 징발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성들은 대운하의 건설에 매월 100여만 명, 만리장성의 보수, 축성에 10만명, 동도 낙양과 이궁의 건설에 200만 명이 동원되었다. 가령 강남의 훌륭한 목재 한개를 낙양에 운반하려면 2천 명의 인부가 동원되어야 했다.


낙양은 동주시대 이래 중요성은 인정되었지만, 대개 역대왕조에서 천혜의 군사요충지이자 관중의 곡창지대를 거느린 장안의 세에 눌려 있었다. 


그러나 강남의 경제가 개발되고 대운하가 건설되는 즈음에 이르러서는 남부그이 운하가 합류하는 낙양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지금도 낙양 주위에는 큰 건물이 들어갈 정도의 대형 곡물창고들이 발굴되고 있다.


웅장한 낙양성은 전국에서 수집한 진기한 동식물들로 가득했다. 장안에도 전한시대의 장안성 동남쪽에 거대한 대홍성의 축조를 시작했다. 


장안의 서원은 둘레 2백 리의 거대한 궁원이었는데, 그 가운데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고, 그 안에는 신선들이 산다는 봉래, 방장, 영주의 인공산을 조성했다. 


거대한 인공산 위로는 궁전, 망루등이 장관을 이루었다. 겨울이 되어 나뭇잎이 떨어지면 색색의 비단으로 꽃과 잎새를 만들어 나뭇가지에 매달았고, 임긍이 배라도 탈 양이면 얼음을 깨뜨려 앞길에 꽃을 흩뿌렸다.


또 장안에서 강도(양주)에 이르는 운하를 따라 40여 개의 이궁을 지었다. 양제는 운하 양옆에 드리워진 버드나무 사이로 거대한 운하를 따라 뱃놀이를 즐겼다. 


순행을 빙자한 수만 척 배의 행렬은 2백리에 달하고, 노를 젓는 사람만 8만 명, 황제가 탄 이른바 용선은 4층에 길이 600미터, 120개의 방을 가지고 있었다. 


운하의 양쪽 언덕에는 호위병사들의 황금 갑주가 눈부시게 빛났으며, 군대의 휘황한 깃발이 하늘을 덮고, 대행렬의 그림자가 강물에 출렁거렷다.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제왕의 화려한 생활은 중국의 고대제국에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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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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