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26. 예술을 위한 예술의 탄생
문벌 귀족사회의 성립( 3세기 ~ 6세기 )
'글을 보고 그 사람을 안다'라는 말이 있지만, 중국 사람들은 글을 담아내는 글씨 또한 사람의 인품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는 예를 존중하는 중국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할 터이지만, 표의문자인 한자가 갖는 독특한 회화성도 한몫을 단단히 거들어 '서예'라는 독립된 예술분야가 개척되기에 이르렀다.
왕희지가 그 선구자로, 사람들은 그의 이름 앞에 서성이라는 칭호를 덧붙여 부르면서, 서예가의 대명사로 그를 떠올리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는 놀라운 끈기와 정열로 한, 위의 비문을 연구하여, 예서 외에도 당시까지 아직 미진했던 해서, 행서, 초서를 예술적 서체로 완성해냈다. 그의 글씨는 힘이 있으면서도 전아하여 귀족적이라는 평을 받는다.
그가 처음 글씨를 배웠던 어린 시절에는 솜씨가 또래들에 미치지 못할 정도였으나, 남다른 외골수의 집념으로 일가를 이루어냈다. 그의 머리 속은 공부할 때나, 식사할 때, 길을 걸을 때, 언제나 서체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고, 한번 글씨에 열중하면 흠뻑 삼매경에 빠져들어 아무것도 그를 방해할 수 없었다.
연일 옷 위에도 손가락 글씨를 써대니, 옷이란 옷은 이내 너덜너덜해졌으며, 벼루를 씻었던 그의 집 연못은 어느새 온통 시커멓게 변해버렸다고 한다.
왕희지의 열렬한 팬이었던 어떤 도사는 왕희지가 흰 거위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꾀를 내었다. 그에게 깃털이 흰 거위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왕희지는 그를 찾아가서 거위를 팔 것을 청했다. 도사가 말하기를,
"거위를 팔 수는 없습니다만, 제게 만일 <도덕경>을 베껴주신다면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왕희지는 기꺼이 붓을 들었고, 도사는 꿈에서 그리던 그의 글씨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일이 있자 사람들은 왕희지의 글씨를 '거위와 바꾼 글씨'라고 불렀다.
당태종도 그의 글씨를 사모하여 <난정서>를 자신의 무덤에까지 가지고 갔다고 하는데, 능이 도굴되었기 때문에 그 진품은 유실되었다.
난정은 거울 같은 시내와 울창한 대숲으로 둘러싸인 희계 땅의 명소다. 왕희지는 어느 봄날 41명의 명사들은 난정에 초청, 시의 향연을 벌였다.
시인들은 냇가 돌부리에 걸터앉아 술잔을 기다리고, 술을 가득 담은 술잔이 마치 나뭇잎처럼 냇물 위로 일렁이며 내려온다.
술잔이 시인의 앞에 다가오면, 단숨에 이를 들이키고 이내 시 한 수를 적었다. 갑자기 한 권의 시집이 완성되었고, 왕희지가 서문을 썼으니, 이 글이 바로 <난정서>. 중국 행서의 대표작이다.
낭만적인 이 장면의 연출은 왕희지가 당대의 귀족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명가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동진의 최고 명족인 낭야 왕씨로, 사마의의 증손인 사마예가 동진을 세운 후 3대에 걸쳐 왕조의 기초를 세우는 데 헌신한 왕도의 사촌동생의 아들이었다. 현재 남경시 교외의 상산에는 약 5만 평에 달하는 왕씨 일가의 묘지와 전실묘가 있어 이들의 권세를 짐작하게 한다.
위진남북조 사회가 전반적으로 그렇지만, 특히 강남에 쫓겨온 한족의 남조사회에서는 이러한 명족들의 위세가 황실을 위협하고 있었다.
명족들은 북방의 유목민족의 남침을 제어하기 위해 통일왕조를 원했을 뿐, 황실은 또 하나의 명족에 불과한 따름이었다. 황실이나 왕씨, 안씨, 주씨 등 명족의 무덤에는 대차가 없으며, 이때부터 선산을 정해 일가의 묘역을 삼는 제도가 시작되었다.
위진남북조 시대를 귀족사회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귀족들은 일정한 지역을 구획할 정도로 넓은 대농장을 갖고 있었으며, 위나라 이후의 관직 추천제인 9품중정법을 통해 관직을 독점했다.
대등한 집안끼리만 통혼이 이루어지고 귀족의 가문은 세세로 이어졌다. 명실상부한 귀족사회가 성립되자, 이에 따라 귀족문화가 개화하게 되었다.
20세기의 대문호 노신은 남조를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시대'로 지칭했다. 이제 예술의 목적은 통치자의 백성에 대한 교훈적인 의미를 탈피하여, 진정한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단계에 돌입하게 되었다.
서예뿐만 아니라 문학, 회화도 이때에 비로소 독립된 예술분야로 정착했으며, 각 분야의 평론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양나라의 소명태자는 육조의 시와 문장을 모아 <문선>을 편찬했다. 4자 6자의 대구로 이루어지는 이른바 4, 6병려문은 시각적 형식뿐만 아니라, 청각적으로도 사성의 격식을 따지는 고도의 형식미, 완성미를 강조함으로써 그 귀족적 성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병이란 나란히 달리는 두 마리의 말을, 려는 남녀의 동반자를 일컫는다.
전원시인 도연명은 당시의 부패한 정계에서 관리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 '새장에 갇하는 새'의 신세에 떨어질 뿐이라 생각하여 세번 관직에 올랐다가 세 번 물러났다. 이때 그가 남긴 글이 유명한 <귀거래사>인데, 당시 불교에서 유행했던 <귀거래찬>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동쪽 울 밑의 국화 한 송이를 꺾어 들고
유유히 남산을 바라본다.
이 귀절은 연작시 <음주>의 일부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술을 벗삼아 향리의 전원생활을 노래하고 아름다운 전원시들을 남겼다. 소명태자는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술을 어지러운 세태에 대한 부정을 애써 감추고자 하는 의미로 파악했다.
중국 회화사상 최초로 굵은 획을 그으며 등장한 화가이자 이론가인 고개지도 동진 때의 사람이다. 당시에는 산수화보다 인물화가 유행했지만, 눈에 보이는 형상보다 내면의 정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중국화의 기본정신이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364년 수도 건강의 와관사 벽에 그린 유마거사상이 꼽힌다. 와관사를 짓는 데 당대의 명사, 고관들이 10만 전 정도의 시주를 했는데 가난한 고개지가 백만전을 약속하여 사람들을 휘둥그레 놀라게 했다.
그는 주지에게 다만 절 가운데의 벽면 한쪽을 부탁하고는 유마거사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유마거사는 산스크리트 어로 '청정무구'를 뜻한다.
깊은 묵상으로 정신을 몰입한 고개지가 마지막으로 눈을 찍어 점정함으로써 거사상을 완성하는 순간, 유마거사가 마치 되살아난 듯 자비스러운 눈으로 법당 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감동한 신도들은 너도나도 전대를 풀어 시주하니 지켜질 것 같지 않았던 그의 약속은 실행되었다.
그의 작품 중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여사잠도>는 장효가 지은 <여사잠>이라는 책에 삽화식으로 그려넣은 그림이다. 여사잠은 서진의 혜제 때 권력을 휘둘렀던 가황후 일족을 경계, 궁중의 여인들의 본분을 교훈적으로 적은 책이다. 이 그림은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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