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23. 천하 삼분의 적벽대전



동아시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평생에 한번쯤은 만화, 소설, 혹은 드라마로 각색된 <삼국지>의 세계를 접할 것이다. 그 원형은 원말 나관중에 의해 씌어진 <삼국지연의>이다. 


이 소설은 역사서인 진수의 <삼국지>를 토대로 하여 이를 재구성하고 소설적 재미를 덧붙여 완성되었다. 


따라서 우리들의 매력적인 영웅 조조나 도원의 결의로 맺어진 의형제 유비현덕, 관우, 장비, 하늘이 낸 군사 제갈공명 등은 소설적 허구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만은 아니다.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라 할지라도 시대를 초월할 수는 없다. 


당대의 유명한 인물 평론가 허소는 무명의 청년이었던 조조에게 (난세의 영웅, 치세의 간적)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184년, 황건의 대란이 거대한 한제국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게 되자, 이들 군웅들은 토벌대의 이름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조조와 손견은  장교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고, 유비도 대상인의 원조를 받아 관우, 장비와 함께 토벌에 나섰다. 이때 조조와 손견의 나이 30세, 유비의 나이는 24세였다.


토벌에 나섰던 각지의 호족들도 스스로의 힘에 놀라고 자신의 실력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난이 일단 진압되자 중앙중권은 다시 정쟁에 휩싸였다. 외척 하진은 동탁을 끌어들여 환관 세력을 일소하려 했으나 오히려 환관에 의해 제거되고, 낙양의 시민들에게 포악한 동탁의 횡포만을 더해주게 되었다. 


첫 번째의 군벌 동탁이 거리에서 그의 부장 여포에게 살해되자, 시민들은 환허성을 지르며 뛰어나와 살찐 그의 배꼽에 불을 켰던바, 그 불은 다음날 아침까지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의 실력자는 명문 구세력의 대표 원소였다. 그는 황관 2천명을 주멸하고 구질서의 회복을 꾀했으나, 관도의 대전에서 신진 세력인 조조의 군대에 격파되었다.



조조는 재빨리 방황하는 후한의 어린 황제 헌제를 맞아들여 명분을 얻었으며, 일종의 국가 소작제인 둔전제를 실시하여 국가의 기반을 확충,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로 부상했다. 


둔전제란 정부가 직접 몰락한 농민들을 불러모아 황폐해진 농경지를 할당, 정착시키는 제도로, 종래에 군대의 자급자족을 위해 변방에 실시되었던 것을 민간에 적용시킨 것이다. 조조는 현실적인 정치가에게 필요한 문무의 자지을 모두 겸비한 뛰어난 인물이었다. 


한편 강남에서는 손견의 아들인 손권이 양자강 동쪽의 기름진 지대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형 손책만큼 용감하거나 무공에 뛰어나지는 않았으나, 주유, 노숙 등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토착 호족세력과의 연합에 성공하는 등 정치적 자질을 보였다.


유비는 중국인들이 말하는 유덕한 인물이 흔히 그렇듯이 귀가 매우 커서 스스로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아무리 삼고초려의 정성을 기울였다고는 하지만, 황건 토벌의 공으로 말단 관직에 봉직했을뿐, 20년 세월을 조조, 원소 등의 밑에서 전전하여 뚜렷한 세력기반이 없는 그에게, 가문의 보존을 위해 융중에 칩거해 있던 제갈량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을 보면 상당한 매력이 있는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는 환관을 양조부로 하고 뇌물로 승진을 거듭한 아버지를 둔 조조와는 달리, 전한 경제의 후손이라는 것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는 그의 시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확인할 길은 없다. 그는 일찍이 고아가 되어 돗자리를 짜서 생계를 유지하는 빈한한 생활을 했다.


제갈공명은 형주의 유포에 의탁하고 있던 유비에게 흉중 대책, 이른바 천하 삼분의 계략을 토로했다. 그는 유비가 천하의 요새이자 양장강 중류의 요충지인 형주와 기름진 평야지대인 익주를 장악하여 터전으로 삼아야 하면, 이를 위해서는 일단 동쪽의 손권과 연합, 북방의 조조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208년 천하통일의 꿈을 안은 조조의 백만 대군이 형주를 향해 남하했다. 공명은 조조의 위력 앞에 망설이는 손권을 찾아가, 뛰어난 정세분석으로 그를 설득, 연합에 성공했다. 


실제로 조조의 북방군은 대군이지만 투지가 없는 정복민이 많은데다, 남방의 풍토병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손권은 주유의 지휘하에 3만의 군대를 내었고,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양군은 대치하게 되었다.


주유의 부장 황개는 조조군에 위압당한 듯, 거짓 항복의 깃발을 꽂고 조조의 진영에 나아갔다. 그를 따르는 10척의 배에는 마른 섶과 갈대가 가득 실려 있었다. 


이를 까맣게 모르는 조조의 군사가 환성을 지르는 순간, 조조의 진영에 가까이 접근한 황개는 재빨리 신호를 올렸다. 


때마침 세찬 동남풍이 불어대자 불붙은 선단은 조조의 함대에 돌입, 조조의 대선단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온천지가 불에 뒤덮이고 조조은 군대를 모두 잃고 겨우 목숨만을 보전, 도망했다. 이것이 유명한 적벽대전이다.


조조군의 참패에 치명적이었던 것은 모든 배가 서로 연결되어 도망할 겨를도 없이 몽땅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수전에 익숙치 못했던 조조는 군사의 도망을 막고 배멀미를 줄이기 위해 전선을 모두 쇠고리로 연결하여 한덩어리로 만들어놓았다.


220년 조조가 66세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자, 그의 아들 조비는 헌제를 압박, 선양의 형식으로 새 왕조 위(魏)를 수립했다. 이후 유비가 한(漢)을, 손권이 오(吳)나라를 세우게 되니, 중국의 천하는 명실공히 삼국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삼국의 국력을 비교하자면 단연 위가 압도적으로 우월했으며, 촉한의 세력이 가장 미미했다. 유비마저 죽고 미력한 그 아들 유선이 위를 계승했을 때, 제갈량은 명문으로 유명한 <출사표>를 바치고 북벌전에 나섰다가 마침내 진중에서 병사했다.


'신, 은혜를 입고 감격을 이길 길 없어 이제부터 출진하려 하옵는바, 표를 바치려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사뢸 바를 모르겠나이다...'


이같을 서두로 시작하는 출사표는 상주문이라기보다 오히려 유언잔에 가까운 것이었다. 제갈량의 자는 공명, 그는 뛰어난 지략과 충성된 신하의 모범으로 후세에 널리 숭양받았는데, 유비보다 20살 아래였다.


이때의 북벌전에서 활약한 위의 명장은 사마의였다. 그는 끝까지 촛의 공격에 응수하지 않고 성을 굳게 지켜 지구전으로 나아감으로써 물자가 부족한 촉의 자멸을 이끌었다. 


그는 회하 유욕의 둔전에 성공함으로써 사마씨 정권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그의 손자 사마염은 마침내 진(晉)나라를 수립, 280년에는 오를 멸망시키고 잠시나마 전국을 통일했다.


흔히 삼국시대를 낭만적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생사기로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대였음을 상기할 필요는 있다. 


한편, 삼국의 경쟁 속에서 내지의 국토는 더욱 확장, 개발되었고, 특히 위나라에서 시작된 여러 제도, 일종의 국영농장인 둔전屯田의 토지제도, 관리 추천제인 9품관인법九品官人法 등 선진적인 여저 제도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한 전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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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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