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35. 9세기 중국의 생활상, 신라방, 견당사

일본 승려 엔닌의 일기(838~847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현장의 <대당서역기>, 엔닌의 <입당구법 순례행기>를 세계 3대 동방 여행기로 꼽는다. 


<대당서역기>는 7세기 인도, 그리고 <입당구법 순례행기>와 <동방견문록>은 9세기와 13세기의 중국의 역사에 대한 귀중한 자료이다. 이들은 당시의 생생한 인간의 숨결을 그대로 간직,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연대기적 역사 서술과는 전혀 다른 감흥을 안겨준다.


<동방견문록>은 서양세계에 중국을 처음으로 소개한 서적으로 유럽 사회에 커다란 충격과 파문을 던졌다. 그러나 너무나 이질적인 문화권에서 온 상인 마르코 폴로의 눈을 통애 소개된 중국의 문물은 반드시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불교를 '우상숭배' 정도로 가볍게 치부해버리기도 했고, 게다가 그의 기록은 그가 여행을 마친 지 수년이 경과한 다음, 어렴풋한 기억에 의존한 채 씌어진 것이다.


이에 비해 일본 승려 엔닌의 순례기는 놀랄 만큼 상세하고 그려낸 듯 정확하다. 그는 불교와 한자문화를 공유한 동아시아 문화권의 일원으로서 중국을 따뜻한 시각으로 깊이 있게 이해했으며, 예리한 관찰력으로 중국의 관료나 민중생활의 실상을 일기형식으로 그때그때 기록함으로써 여행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엔닌은 일본 동부의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15살 때 연력사에서 일본 천태종의 개조인 사이초의 제자로 불교계에 입문한 그는 마침내 불교계의 최고의 지위에 올라 일본 불교계에 새로운 족적을 남겼다. 


명족들이 지배하는 당시 사회에서 그가 이러한 성공을 일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9년 반 동안의 위험에 가득 찬 중국 순례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가 새로이 가져온 밀교의 화려한 의식과 예술품, 풍부한 상징들이 일본의 궁정인들을 매혹시켰다.


838년 그는 견당사의 일원으로는 좀 많은 46세의 나이로 중국 순례의 길에 나섰다. 견당사는 조공의 형식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던 외교 사절단으로 일본이 중국의 고고의 문물을 직수입하는 주요한 통로였기 때문에 많은 지식인들이 승선하고 있었다. 


종래에 일본은 우리 나라를 통해 간접적으로 대륙의 문물을 섭취했으나, 7세기 초 쇼토쿠 태자가 통일국가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점차 대규모적인 사절단을 중국에 파견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중국과의 대등한 관계를 강조하면서 다른 나라처럼 중국의 신하가 되는 형식을 밟는 책봉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엔닌의 일기는 중국황제의 알현에서 대사 등 일본의 사절들이 받았던 중국의 관위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견당사의 파견은 일본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국가적 대사였으나, 당시의 항해기술로는 조난의 위험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일본 천황은 '견당사를 보내는 연회'를 직접 베풀고 대사와 부사에게 '권위의 칼'을 수여하는 의식을 통해 선상에서의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젊은 대사에게 정2품으로의 파격적인 승진이 이루어지는 등 위험한 사명을 띠고 떠나는 일행에게는 높은 관직과 각종 하사품이 전달되었고, 이들의 무사귀환을 비는 전통 신도와 불교의 신들에 대한 봉헌과 기원이 연일 계속되었다.


당시 신라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일본은 신라 연안을 따라 육지를 육안으로 확인하면서 항해하는 항로를 택하지 못하고 공해상을 직접 통과하는 위험한 항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세 차례의 시도 끝에 어렵게 중국에 도착했을 때, 4척의 배에 651명으로 출발했던 사절단 중에 391명이 생존하고 있었다.


엔닌은 당나라에 발을 디딘 후 최초로 목도한 거대 도시 양주로부터 수도 장안에 이르러 당나라 황제를 알현하기까지 거쳤던 크고 작은 도시와 촌락, 관료와 민중들의 구체적인 생활모습들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된 관심은 역시 천태종의 본산인 천태산을 순례하는 것이었다. 그의 순례 신청은 사절단의 일정 안에 매듭될 수 없다는 이유로 불허되었고, 마침내 그는 사절단과 떨어져 중국에 불법체류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림으로써 오늘날 우리들은 그의 귀중한 일기를 더 연장시켜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의 일기에 등장하는 신라인의 존재다. 그의 일기에서 일본인들은 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나 신라인들은 중국인과 비등하게 자주 나타나고 있다. 신라인들은 당나라에 머무는 여러 외국인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신라인은 견당사절의 배에 탑승했던 신라 통역 김정남인데, 그는 공해상의 항해기술뿐만 아니라, 중국 내의 사정에 정통하고 있어서 사절단의 통관절차를 보다 용이하게 하는 역할을 했으며, 사절단의 귀행에서도 선박을 보충, 수리하거나, 우수한 신라 선원의 탑승 등을 주선했다.


엔닌에 의하면, 페르시아나 아라비아인들에 의한 해상무역이 고조되던 당시에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은 신라인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었다. 


이들의 동아시아의 무역의 중국 최대 종착점은 대운하와 회하를 연결하는 요충인 초주엿으며, 신라의 거점은 중국으로부터 신라의 서안에 이르는 무역로와 반도의 서남단을 돌아 신라 수도 경주와 일본에 이르는 무역상의 요충지 완도(청해진)였다. 


일본 내의 무역거점은 확인할 수 없으나, 엔닌은 장보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를 대사로 부르면서 극진한 존격의 표현으로 시종했는데, 그는 일본을 떠날 때 장보고에게 바치라는 일본관리의 편지를 지니고 있었다.


중국의 신라인들은 산동반도 남안 일대와 회하 하류 일대에 집중되어 방대한 신라조계를 셩성하고 있었으며, 신라방 내의 행정은 신라인의 총독이 관장, 치외법권적 지위를 부여받고 있었다. 


엔닌은 그중에 장영이나 유신언 등과 교유하면서 커다란 도움을 받았는데, 이들은 말하자면 신라 영사였던 셈이나, 신라 정부에서 공식 파견된 사절이 아니라, 위대한 모험가요 무역왕인 장보고의 대리인이었다.


적산 법화원은 신라를 왕래하는 배들의 최초의 도달점인 산동의 높은 언덕 위에 세워져 있어 황해를 수호하고 신라 배들의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했다. 장보고는 이 절에 연간 500석을 수확할 수 있는 토지를 기부했다.


장보고는 막강한 해상력을 근거로 점차 신라 정부에 영향력을 갖게 되어 청해진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위기에 처해 그의 보호를 받았던 우정이 신무왕으로 즉위한 후 점차 왕위계승 분쟁에 휘말리더니 골품 귀족들의 반대로 841년 마침내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과 함께 신라의 해상왕국은 쇠퇴하고 점차 제해권은 중국인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엔닌은 남쪽 항구의 여러 곳에서 교역하는 신라의 배를 만났고, 삼림이 많은 산동에서 초주로 목탄을 수송하는 신라인의 배를 보았다. 


한번은 적산원에 머물면서 신라인들의 대명절인 8월 15일을 지냈는데, 신라인들은 모두 모여 수제비와 떡을 장만하고 흥겹게 노래부르고 춤추기를 3일 밤낮을 계속했다고 했다. 


엔닌은 이날을 신라가 발해에게 대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는 행사라고 기록했으나, 그도 발해 사절단을 만났던 것처럼 그것은 발해가 아니라 고구려였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당말의 상황을 왕조 붕괴기로 보고 적어도 관료조직은 크게 해이해져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의 튼튼한 관료 행정조직은 당망에 이르러서는 한말 같은 혼란은 보이지 않고 있었음을 엔닌은 확인시켜준다. 당시의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정연한 고도의 행정조직은 유지하고 있었다.


엔닌은 천태산행의 탄원이나 지방장관이 발행하는 통행증의 발급 또는 갱신 등을 위한 중국관료와의 절충과정을 통해 당나라 관료제도의 치밀하고 복잡한 조직을 알게 되었다. 


양주 절도사로 있던 거물 정치인 이덕유에게 천태산 행의 허가를 내어줄 것을 설득했으나, 그는 정중하지만 확고하게, 자신의 허가증은 관할하에 있는 8주에 한정되어 있음을 알리고 이를 거절했다. 


중국의 관료는 규정에 따라 모든 것을 문서로 남겨놓으려는 관료의 획일적이고 융통성 없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복잡한 절차로 엔닌의 여행을 지연시키기는 했으나, 뇌물을 받고 직권을 남용하는 부정한 방법은 거의 통용되지 않았다.


엔닌 일행은 중국을 유랑하는 동안 도로나 거리의 정확항 정보를 얻지 못하여 불편을 느낀 적은 좀처럼 없었다. 당시 중국은 수도 장안에서 변방의 국경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도로와 수로가 방사선상으로 그물눈처럼 설치되어 있었다. 


엔닌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5리마다 표식을 세우고 10리마다 다시 하나의 표지를 세웠는데, 이를 '리격주'라고 불렀다. 표지는 흙을 사각으로 쌓아올려 위를 뾰족하게 하고 아래를 넓힌 모양이었다.


엔닌은 여행중에 식량이나 숙박의 문제로 거의 고생을 하지 않았다. 중국은 주요도로를 따라 공식적인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한 역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는 육로 통행에서는 (매역마다 나귀를 빌려 문서 보따리를 운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통행증을 지닌 여행자들은 주변에 달린 점이나 관으로 불리는 관영, 혹은 민영의 숙박시설에 머물 수 있었다. 또한 승려였던 그는 절을 발견하면 그곳에 머물렀으며, 불교신자들에게 개인적인 후원을 받기도 했다. 


당시 사원의 시설은 승려만이 아니라 외국사절이나 관리, 혹은 일반 여행자 등 그것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여관과 사원을 겸하고 있었다.


엔닌은 해주의 동쪽 연안지대에서 북쪽까지 '소금이 모여있는 장소를 겨우 빠져나가기도' 했으며, 델타지대에 2천 마리도 넘을 것 같은 오리가 대규모로 떼지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4세기 후에 마르코 폴로가 보고 놀랐던 석탄에 대해서 (산 주위에는 석탄이 많아 멀고 가까운 곳의 여러 주민들은 이것으로 불을 지폈다. 음식을 요라하는 경우에는 놀랄 만한 열량을 발휘했다. 사람들은 번개로 탄 것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이곳의 중생들에게 부처님이 내린 보상인 것에 틀림없다)고 기술했다.


엔닌은 메뚜기의 습격을 받은 중심 마을을 지났는데, '발아한 곡물은 모두 메뚜기에 갉아먹혀서' 기근이 닥쳤으며, 마을사람들은 짐승 사료인 작은 콩이나 도토리를 주워먹기도 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기근으로 도적떠로 변한 사람들의 습격을 우려했던 관료들의 우려와는 달리 엔닌 일행은 한 번도 습격을 당하지 않았다.


그는 황하의 모습을 (물은 누런 진흙빛이고 흐름은 마치 빠른 화살과 같다)고 묘사하고, 황하 양안의 벽을 둘러친 선착장에는 (많은 뱃사람들이 다투어 손님을 태우려고 대기하고 있었다)고 했다. 


일행이 강가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찬 죽을 네 사발씩 먹자 깜짝 놀란 점포 주인이 체한다고 걱정했던 것까지 기록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혜성을 '빛나는 칼'과 같다고 했으며, 혜성이 나타나면 국가가 쇠퇴해지고 군사상의 혼란이 일어난다고 하여 황제는 혜성이 나타나면 경계하여 궁전에 머무르지 않고 멀리 낮은 장소로 옮겼으며 엷은 베로 몸을 돌렸다. 


대사면령을 내리고 여러 사원에 명령하여 경전을 송독하게 했다. 그는 3회의 월식과 1회의 부분일식을 보았는데, 한번은 적산원에서 월식이 일어나 승려들이 (모두 방 밖으로 뛰어나가 소리를 지르며 목탁을 두들겼다)고 기록했다.


오늘날같이 새해 첫날은 당시의 중국인들에게도 가장 큰 명절로, 사흘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섣달 그믐날이면 지폐(혹은 동전모양의 종이)를 태워 부귀와 만복을 축원하고, 자정이 되면 '만세'를 외치면서 폭죽을 터뜨렸다. 


죽과 만두와 여러 가지 과자 등 많은 음식이 차려졌고, 집집마다 대나무 기둥에 기를 당아 세우고 장수를 기원했다. 사람들은 새해 달력을 구입했는데 엔닌은 이 달력 전체를 베껴놓았다. 달력에는 60일을 주기로 하는 달의 첫날, 24절기, 제례날, 그밖의 민간신앙 정보 등이 기록되었다.


동지 전날밤에는 일본의 섣달 그믐날처럼 아무도 자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음식을 넉넉히 차려먹고 역시 사흘간의 행사를 가졌는데, 서로 절을 하며 (동지를 축하한다)며 덕담을 나누었다. 


승려들은 (세상에서 오래 사시면서 모든 중생들을 화목하게 하기를 삼가 바라옵니다)라고 인사했다. 엔닌은 이덕유에게 (서서히 이동하여 태양이 남쪽 끝에 이르렀습니다. 삼가 존체 만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라고 인사했다.


불교는 당시 널리 민간에 유행하여 그 절정에 달했다. 절은 변두리 마을이나 산지에서도 흔히 발견되었으며, 불교신아은 깊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북중국 평원의 어느 불교신자는 그곳을 통과하는 승려에게는 사람 수를 묻지 않고 식사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유를 위시하여 점차 새로이 등장하는 신유학 관료들 중에서 외국 종교인 불교를 규탄하는 움직임이 시작되더니 무종 대의 불교 대탄압이 시작되었다. 엔닌은 장안에서 이를 집접 목도하고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842년 시작된 불교 탄압은 처음에는 종래와 다름없이 경제적인 이유에 기인했다. 사원의 면세토지의 증가나 면역이 되는 승려 수의 증가는 종종 국가의 제한조처를 불러왔었다. 


사원 재산의 몰수나 젊은 승려의 환속 등의 조처가 있었고, 사원 내의 불상이나 종등의 쇠붙이가 염철의 관료에 의해 거두어져 농기구나 동전으로 주조되었다. 


그러나 844년 이후 무종이 도교의 광신으로 기울어지면서 경쟁상대였던 불교세력에 대한 전면적이고 폭압적인 대탄압으로 변화했다. 불교사원은 폐허가 되고 승려들은 거의 환속되었다.


엔닌은 불교 탄압의 일환인 외국 승려 추방의 칙령을 맞아 '비통하면서도 기쁜 양면이 있었음'을 토로하고 있다. 수년간 귀국 청원을 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국의 도정에서 그는 참담히 파괴된 무수한 사원을 만났으며, 그중에는 적산 법화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엔닌은 다시 신라 친구들은 만났고 그들의 보호 속에 그동안 모아온 귀중한 불경이나 만다라를 보존할 수 있었다. 마침내 846년 무종이 도교의 불로발사의 약을 잘못 먹은 탓으로 죽음에 이르자 불교의 대탑압은 중지되었다. 


847년 9월 2일 정오, 엔닌 일행은 신라인 친구들의 배웅 속에 신라인 김진의 배를 타고 산동의 적산포를 출발, 귀국 행로에 올랐다. 


다음날 밤에 신라 서남단의 작은 섬에 도착한 그들은 순풍을 기다려 정박하기도 하면서 남해안을 돌아 규슈를 거쳐 9년 3개월 전 엔닌의 출발지인 하카다 만에 도착한 것은 9월 17일이었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전화카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