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42. 상업도시의 발달과 도시문화
지폐 교자의 공인(1023년)
북송의 수도 변경의 도시생활을 그린 <청명상하도>를 보면, 사람들이 서로 몸을 부딪힐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왁자한 거리에서 도시민들의 활력이 가득 느껴진다.
또한 이를 소개한 맹원로의 <동경몽화록> 등은 변경의 활기찬 도시 모습을 다시금 우리에게 확인,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한다. 어떻게 마치 19세기인 양 착각을 일으킬 만큼 이와 같은 화려한 도시생활이 12세기 이전에 가능했던 것일까?
도시민들 중에는 부재지주, 사대부, 하급과료나 서리, 서숙의 교사, 상인 배우, 창녀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계층들이 존재하였을 터이다.
이제 도시는 당대까지의 정치 도시적 성격에서 탈피, 상업도시로의 대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대에는 10만 호 이상의 대도시가 10여 곳에 불과하였으나, 북송대에는 40여 곳으로 늘어났으며, 전국 각지에는 시, 진이라고 불리는 중소 상업도시가 널리 출현하게 되었다.
당의 장안은 큰길로 반듯반듯하게 구획된 백 수십개의 방으로 나뉘어지고 방마다 담장이 둘러쳐져 있는 폐쇄적인 도시였다.
서민들에 대한 통제도 자심해서 서민들은 큰길을 향해서는 문을 열지 못하고 방문으로만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해가 진 후부터는 성문, 방문이 모두 폐쇄되었다. 상업활동은 동서에 설치된 두개의 구획, 즉 시로만 제한되어 있었으며, 역시 야간영업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송대, 1038년에는 방벽이 무너지고, 시의 제한은 없어졌다. 상점들이 성 안의 각 곳에 진출, 도로 양측에 즐비하게 되니, 성내 전체가 번화가로 변해버렸다. 각종 물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전문상점가가 출현, 상인 조합인 행, 수공업자 조합이 작이 조직이 되었다.
야시장도 서서, 밤에도 찬란한 등불이 대낮과 같이 거리를 밝혔으며, 새벽에만 반짝 섰다 사라지는 도깨비 시장도 섰다. 성벽 밖에까지 인가가 넘쳐, 이를 보호하기 위해 새로 바깥 둘레에 성벽을 쌓으니, 그 규모는 장안의 3배에 달했다.
도시의 구조는 완전히 개방되고, 도시민들의 생활은 보다 자유로워졌다. 시민들이 향유하는 각종의 서비스업이 출현하게 되었다.
와자라는 오락거리에는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이 생겼고, 거리에는 야담, 마술, 곡예, 씨름, 연극 등 온갖 구경거리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십 개의 음식점, 술집, 찻집이 즐비한 골목도 생겨났으며, 그중에는 수백 명의 창녀를 고용한 창녀를 고용한 요정도 있었다. 곳곳에는 각종 일용품이나 애완동물 외에도, 서적, 문방구류 등도 판매되고 있었다.
서적이 거리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 시기의 매우 새로운 현상이었다. 그 배경에는 당대 이후의 사설 서당과 서원의 증가, 특히 송대의 과거제의 확대와 인쇄술의 발달이 있었다.
송대에는 문화의 향유층이 보다 확대되고, 적어도 법적으로는 과거제도가 서민층에게 열려 있었던 것처럼 평등주의의 실현이 전대에 비해 진전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서민들 중에 그 어려운 한자를 터득한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을 것이고, 역시 문화의 주도층은 사대부층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와 희곡의 중간적 위치를 차지하는 '사'가 널리 유행, 송대 문학의 새로운 경향을 대표한다. 서정시에서 유래하는 '사'는 도시의 찻집이나 주점 등에서 대중가요로 불려지게 되었다.
'사'는 음조에 따라 자유롭게 구사되며 구어체를 많이 사용했는데, 점차 문장가들의 천시로부터 벗어나, 소동파를 많이 사용했는데, 점차 문장가들의 천시로부터 벗어나, 소동파를 위시한 송대의 유명한 시인들이 적어도 약간의 사를 남기는 바가 되었다.
도시의 구란이라는 연예장에서는 잡극이 공연되기 시작, 고전연극이 출현하게 되었으며, 전문가수나 예인도 출현하였다. 지방의 소시장이나 촌사, 사묘 등지에서도 편력배우에 의한 연극이 출현, 농민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도시의 발달과 도시문화의 성장 토대는 당말 이래 비약적 발전을 거듭했던 경제의 성장에 있었다. 농업생산의 획기적인 발전과 지역적 분화는 전국적인 유통망의 확대를 요구하고 있었다.
인구도 놀랄 만큼 증가하여 12세기 초에 중국의 인구는 처음으로 억대를 돌파하고 있었다. 특히 경제적 비중이 커진 강남의 인구증가는 두드러진 것이어서 남중국 대 북중국의 인구비율은 대략 6.5 대 3.5의 비율을 보이고 있었다.
인구의 증가,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중에서도 능력있는 구매자의 성장으로 이제 상품생산에 돌입한 각 분야의 생산물은 보다 광범한 수요자를 맞아 활발히 교환되었다. 상품도 소수 지배자의 사치품 단계에서 벗어나 좀더 일용적이고 대중적인 것으로 확산되었다.
여기에 대외무역의 획기적인 증대가 가세하니, 송대의 상업은 가히 상업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커다란 질적인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북방의 유목민족과의 무역도 증가했지만, 해상무역로를 통한 아시아 각국과의 무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제 비단길은 서서히 전성기를 마감하고 해양무역이 개시, 광동 등 중국 남부에 대무역 도시를 탄생기켰다. 신라나 아라비아 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남해무역이 중국인들의 손에 장악되기 시작했으며, 대양항해에는 나침반이 사용되었다.
송대의 화폐는 무역로를 따라 일본에서 동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널리 발견되고 있다. 상업혁명은 화폐경제의 발달을 수반, 엄청난 금속화폐가 주조되기에 이르렀다.
당 현종 말기에 연간 30만 관의 동전이 주조되었으나, 송의 신종 대인 11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500만 관으로 폭증, 사상 최고의 수준에 달했다.
상업량이 증폭함에 따라 세계 최초의 지폐인 교자가 발행되는 등 유가증권의 발행도 촉진, 송대에는 역사상 최초로 화폐가 지배하는 경제에 도달했는데, 교자는 성도의 16대 부호들이 당시 사천 지방에서 통용되던 철전이 휴대에 불편한 점을 개선, 철전 대신 유통시 켰던 지폐다.
당국에서는 1023년 사천에 교자무를 설치하여 지폐를 흡수, 이를 공식화했다. 이밖에도 금은포, 전호 등의 금융기관이 나타났으며, 수도 변경에는 일종의 환전소가 생겨 상인들이 이곳에 현금을 넘기고 영권, 즉 수표를 받아간 다음, 다시 지방에서 현금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주판도 발생, 계산기의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현상들은 인플레를 야기하고 농촌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었으며, 서양의 근대에서와 같이 독립된 시민 계층의 출현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행, 작 등 상공업 단체들도 도시행정에의 참여를 추구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국가에 의한 물자조달의 청부기관으로서의 측면을 강하게 띠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이미 중국의 관료제도는 이 모든 변화를 탄력적으로 흡수할 만큼 고도의 수준에 달해 있었다. 오히려 중국정부는 국내상업의 수입과 대외무역의 관세 등을 추렴, 단단한 재정수입을 조달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상품화를 기초로 하는 도시문화의 성장 속에 여성들의 지위는 더욱 하락했다. 도시문화는 농촌에 비해 여성의 노동력이 덜 중요시될 수밖에 없는 조건에 있었고, 여성의 상품화가 진전, 창녀가 증가하고, 축첩의 제도가 널리 성행했던 반면, 과부의 재혼을 반대하는 사회의 관습이 강화되었다.
특히 상류층 사이에서 전족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전족은 이미 오대의 남당에서 시작된 풍습으로 점차 확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적 병폐로 굳건히 자리잡았다.
전족이란 한참 뛰어놀 소녀 시절,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발가락을 아래로 향하도록 꽁꽁 묶어두고 조그만 신에 고정, 기형적인 발을 만든 것이다.
이로써 여성의 발은 정상적인 발의 반 정도에서 성장을 멈추게 되고 뒤뚱거리며 겨우 걷게 되는데, 전족은 남성의 노리개로 전락한 여성의 지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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