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54. 화교들, 동남아시아로 진출
성조 영락제는 황실 내부의 혈투를 거쳐 황제 자리를 빼앗은 야심찬 인물이엇고, 그 야심은 황제가 되어서는 대외적인 영토확장 쪽으로 발휘도기도 했다. 그것을 잘 말해주는 것 중 하나가 정화의 남해 원정이었다.
정화는 홍무 4년 운남에서 태어낫는데, 원래 성은 마씨였고 이슬람 교도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났던 1371년 당시는 명나라가 건국되기는 했지만 운남지역은 아직 원나라의 잔존세력이 지배하고 있었다. 정화의 아버지는 그 지역의 함양왕으로서 원나라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명의 정복군이 공격해왔을 때 정화의 아버지는 끝까지 저항하다 전사했고, 그의 가족들은 반항세력에게 내리는 징벌로 생식기를 거세당하고 연왕 주체의 전리품이 되었다.
연왕 주체는 나중에 조카 건문제를 밀어내고 황제가 된 영락제다. 주체는 정화가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임을 알아보고 그를 가까이 두어 보좌했다.
주체가 조카인 명의 2대 황제 건문제와 피할 수 없는 한 판 승부를 벌인 이른바 '정난의 변' 때 30살 남짓의 정화는 연왕 주체의 기대에 맞게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자 주체는 그에게 정화라는 이름을 내렸다. 주체가 황제가 되었을 때 정화는 환관의 최고 직위인 태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황제가 된 영락제는 자기의 야심을 해외로 펼칠 계획을 세웠고 바다를 통한 대원정을 총지휘할 인물로 정화를 선택했다. 항해는 7차례에 걸쳐 진행되는데, 1차 항해는 영락 3년 1405년에 있었다.
항해 선단은 배 60여 척에, 배에 탑승한 선원의 숫자가 3만 명에 육박하는 대규모였다. 큰 배는 약 8천 톤 규모 정도였다고 한다. 정화의 1차원정 약 90년 뒤에 서양의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도는 새로운 항로를 찾아낼 때 타고 갔던 배의 크기가 고작 120톤 정도인 것과 비교해보면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정화의 남해 원정은 남해, 즉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로 하여금 명에 조공을 바치게 하는 조공관계 확립을 위한 것이었다(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남해 원정은 남경 함락 때 생사를 확인하지 못 했던 건문제의 행방을 찾으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동남아시아에 대한 이러한 정책은 영락제가 태조 홍무제의 쇄국정책에서 벗아나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원래 중국인들은 중국의 넓은 땅에 많은 문물이 있어 부족함이 없는 땅이라고 스스로 자부했으나 외국과의 거래를 완전히 단절해도 좋을만큼 필요한 모든 산물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중국에 없는 물품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도자기의 무늬에 새겨넣는 코발트나 향료 및 보석 같은 것이었다.
정화는 들르는 지역마다 무력시위를 하며 중국과의 형식적인 복종관계를 권유했고 거절당할 때에는 무력을 행사했다. 대부분의 국가는 명나라 대함대의 위력에 눌려 굴복했다.
이때 정화가 가지고 가서 팔았던 물건들은 주로 도자기, 비단 등이었으며, 사들인 외국 물품은 향료, 후추, 진주 그리고 서역지방의 말 등 중국에 희귀한 특산물들이었다.
항해 때마다 대개는 무력시위에 그치고 직접적인 싸움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3차원정 때는 실론(쓰리랑카)과의 싸움이 있었다. 쓰리랑카의 왕의 명 황제의 신하국이 되는 책봉을 거부하자 정화는 기습공격으로 왕궁을 함락시키고 왕을 인질로 잡아 굴복시켰다.
그러나 방문하는 지역마다 대체로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그 지방 토착세력의 풍속이나 습관을 인정하여 우호관계를 맺엇으며, 국왕이나 추장, 왕자 등 토착 지배층들을 중국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4차원정 때는 아라비아 반도까지 갔으며, 5차(1417년)는 동아프리카까지 갔다. 6차원정을 끝내고 귀국하던 1423년의 귀항 때는 1200여 명이 넘는 외국사절들과 동승하고 있을 정도였다.
정화의 원정이 가장 멀리까지 이루어진 것은 마지막 7차원정 때였다. 이때는 1431년으로 영락제가 죽고 손자인 선덕제가 즉위한 뒤였으며 정화가 61세 되던 해다. 마지막 원정은 아프라카 동해안까지 이르렀다.
명나라 때 행해진 정화의 남해 원정은 그후 중국인들이 동남아시아에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동남아시아의 경제와 정치를 장악하고 잇는 사람들은 바로 중국의 화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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