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91. '입술이 망하면 이가 시리다'

 한국전쟁 참전(1950년) 

 

 


1950년 6월 한반도에서 남한과 북한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다.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소집을 요구했고,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유엔군을 파견하게 된다.

 

미국은 남한을 공산세력을 막는 기지로 삼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남한의 공산화를 적극적으로 막고자 했다.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의 확대를 저지하고자 했던 미국의 계획을 중국국민당의 패배로 좌절되었는데, 이제 동아시아 보루인 남한이 공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전쟁은 초반에는 북한의 압도적인 우세로 전개되었으나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1950년 말쯤에는 남한군의 선두부대가 백두산까지 진격, 중국 국경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만일 북한이 패전하여 사회주의권에서 떨어져나간다면 중국으로서는 심히 우려할 상황이 올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러한 우려는 (입술이 망하면 이가 시리다)는 중국 지도자의 말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은 한국국이 38선을 넘는 것은 상관없지만 미군이나 유엔군이 북상할 때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즉, 제국주의자드이 중국침략과 아시아를 장악하려는 움모에 강력히 대항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중국의 이러한 입장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싸움에 밀려 중국 쪽으로 퇴주한 북한군을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중국영토내에 비행기를 띄우기도 했다.  미국의 군사행동은 중국의 위기의식을 더욱 크게 했고, 마침내 중국은 1950년 10월 말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

 

중국 홍군의 최고 지도자 중의 하나인 팽덕회를 사령관으로 하는 인민지원군 약 60만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북한 쪽에 유리하게 기울어 한때 다시 서울이 함락되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은 다시 수복되었고 원래의 경계선이었던 북위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중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북한을 돕자 맥아더 사령관은 대만의 국민당 군대 50만을 동원하여 중국 남부를 공격하고 동북지방에 30 - 40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한 제안에 발맞추어 당시 대통령인 트루먼도 그해 11월에 (원폭 사용을 고려할 수도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은 영국과 프랑스의 반대, 그리고 국제여론도 그것을 지지하지 않는 분위기여서 실행되지는 않았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중국에 대한 경제봉쇄를 했으며 미국의 동맹국에게도 이 봉쇄에 동참하기를 요구했다. 미국은 1951년 5월 유엔 총회에서 중국 및 북한에 대한 전략물자 금수안을 가결시켰다.

 

미국 내에서는 '상호방위 원조통제법'을 통과시켜 특정품목을 공산국가에 수출하는 나라에 대해서는 미국의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이런 미국의 조치는 중국이 자본주의 국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더욱 좁게 만들었다.

 

중국경제는 이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교류로 제한되었고 경제개발에 막 나서는 중국의 상황을 매우 어렵게 했다.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후 1년여 만에 다시 한국전쟁에 참가하게 된 중국은 다시 전쟁수행을 위한 체제로 국가정책을 짜게 되었다. 여러 정파 및 대표자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인민 세계평화방위, 미국침략반대 위원회' 가 만들어졌으며, 미국에 대한 저항의식을 국민에게 불러일으키는 작업들이 행해졌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내에서는 미국의 도움을 받아 국민당 군대가 다시 중국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구체제 인물들과 국민당과 관련된 세력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공산당 간부를 암살하거나 토지개혁을 방해하는 등의 움직임도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한 통제가 강화되었으며 51년에서 52년 사이에는 부패한 관료들과 자본가들의 불법행위를 적발하여 처벌했으며, 지식인들의 사상개조운동이 전개되었다. 


노동자들에게는 국가를 위한 경쟁적인 생산활동을 촉구했고 농민들에게는 사회질서 강화, 민병 참가, 군량납인 등을 요구하였다. 상업이나 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투기방지, 물가안정 등을 이룰 수 있도록 유도했다.

 

많은 인민들이 이러한 정신무장을 하는 교육에 참가했으며 북경, 상해, 천진 등과 같은 대도시 인민들의 80퍼센트 정도가 국가를 위한 애국선언에 동참했다. 공산당 정부는 이러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한국전에 계속 참가하면서 반혁명운동을 완전히 누르고, 토지개혁 등 새로운 국가건설을 가속화시켰다. 


한국전쟁은 51년에 접어들어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어느 쪽도 일방적인 우세를 보이지 않게 되면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이 때 중국은 
  1. 미국에 대항하는 원조운동을 더욱 강화할 것
  2. 애국 증산운동을 제창, 추진할 것
  3. 모택동 사상 학습운동을 조직할 것
등 3개항을 결의했다. 

 

이는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전쟁이 끝나는 이후 미국의 장기적인 군사압력에 대항하고 국방의 강화 및 근대화와 중공업 기반건설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급속하게 만들어내자는 중국 지도자들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은 1953년 휴전협정의 조인과 함께 끝이 났으며 이때부터 중국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착수하게 된다. 


한국전쟁은 중국 내에서 공산당의 중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자유주의자 등 공산당에 속하지 않는 파벌들의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공산당은 중국 내에서 더욱 확고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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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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