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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1.03 중국사 100장면 - 95. 중국대륙을 휩쓴 광기, 문화 대혁명

 

 

 

 

 중국사 100장면 - 95. 중국대륙을 휩쓴 광기, 문화 대혁명 

 


1959년 6월 북경시 부시장인 오함은 인민일보에 (해서, 황제를꾸짖다) 라는 비유적인 수필을 발표했다.

 

명나라 때 해서라는 관리가 황제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그 수필의 한 부분은 (과거의 당신은 매우 조금이었지만 사람들에게 말할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신의 마음은 혼미하고 독단적이어서 편견에 가득 차 있다. 당신은 언제나 스스로 옳다고 여겨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당신의 결점은 셀 수 없이 많다 ... )는 비판이 나온다.

 

이 비판은 과거 황제를 비판하고 있지만, 당시 중국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던 모택동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기도 했다.


50년대 말 60년대 초 모태동은 어느 정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여 스스로 책임을 많은 핵심당원이 모인 확대 중앙공작회의에서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반동세력의 잔존을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되며 그들에 대해 계속 투쟁해야 한다. 이미 전복된 반동계급이 다시 부활을 기도하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다시 새로운 부르주아 분자가 생겨났으며, 따라서 사회주의 전체에 걸쳐 계급과 계급투쟁이 존재하여, 그 계급투쟁은 장기간에 걸쳐 복잡하고 격렬하게 전개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모택동에 대한 비판이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며, 그가 이러한 비판세력들을 누르면서 중국을 광기의 사회로 몰아가는, 이른바 문화대혁명의 조짐이 싹트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 그림은 문화대혁명 포스터. 홍위병들이 모택동의 지도에 따라 문화대혁명 사업들을 추진하는 것을 그렸다. 손을 들고 있는 붉은 책은 모택동 어록집.'

 

 


61년 1월 북경에서는 오함의 <해서면관>이라는 작품이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모택동은 그전에 해서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이 연극은 모택동을 지지하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직접적인 발단은 1965년 요문원의 <해서의 면관을 평한다>는 글이라고 한다. 그 글은 모택동에 비판적인 내용의 글인 북경 부시장 오함의 <해서면관>을 비판한 것이다.

 

이 글이 바로 모택동을 신격화하는 문화대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1966년 5월 청화대학에서 최초의 홍위병이 조직되었으며 6월, 10월 <인민일보> 사설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이란 말이 처음 사용되었다.


1966년 6월 모택동은 북경대학장을 비난하는 하나의 대자보를 널리 공개하기로 하고, 그것을 계기로 그를 비판하는 세력들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그는 상해에서 북경으로 돌아와 8월에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 을 제정하고 공공연하게 혹은 은밀하게 숨어있는 부르주아의 대표적인물, 당내의 자본주의적 실권파를 공격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그 선봉대를 혁명저인 청소년이 맡아야 한다고 했다. 이들 청소년이란 바로 홍위병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청년 노동자, 대학생, 중학생, 심지어 소학교 학생 등이 가담한 홍위병 단체가 무수히 만들어지면서 모택동의 외침에 호응하여 일제히 거리를 휩쓸기 시작했다. 66년 8월 천안문광장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축하하는 100만인 집회가 열렸으며 모택동은 이러한 광기를 동원하여 유소기, 등소평 등을 자기비판하게 하여 실각시켰다.


1967년에 접어들어 각 지역에서 호위병을 중심으로 한 무혁세력은 당과 정부가 장악하고 있던 권력을 빼았기 시작했다. 67년 1월 <인민일보>는 프롤레탈리아 혁명파로 하여금 자본주의 조선의 실권파들로부터 권력을 탈취할 것을 부추키는 사설을 실었다.

 

상해에서는 당과 정부관리를 밀어내고 호위병 중심의 상해인민공사를 만들기도했다. 이것은 모택동이 생각한 제2의 혁명을 통한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공산당 중앙정부는 문혁파들에 의해 탈취된 권력을 하나로 모아 혁명의원회로 통일시켰다. 68년에 이르면 임표가 이끄는 해방군의 지원을 받아 전국적으로 혁명위원회가 성립한다.


그러나 홍위병들의 활동은 68년에 접어들어 서서히 약화되고, 문화대혁명의 불길이 점차 사그러드는 양상을 보인다. 모택동은 더 이상 홍위병들을 이용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대들은 나를 실망시켰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으로서 중국의 전사들을 실망시켰다) 는 말로써 문화대혁명을 진정시켰다.

 

68년 12월에는 도시 청년, 간부 지식인들을 농촌에서 일하게 하는 하방이 제창되었다. 이제 모택동은 자기에게 대항할 만한 세력이나 인물을 어느 정도 정리했기 때문에 홍위병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옆의 그림은 문화혁명에서 천안문광장에서 모여 지지대회를 여는 군중. 문화혁명은 권좌에서 밀려난 모택동이 당권파를 숙청하기 위해 일으킨 일종의 탈권운동이었다.'

 

문화혁명은 1969년에 와서 끝을 맺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임표의 해방군이 가장 부각되었고 임표는 모택동의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문혁 이전까지 관료층으로서 실권을 가지고 있던 세력들은 밀려났고 문화계에도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약70만 명이 문혁기간 동안에 불이익을 당했다고 한다.


호위병에 가담하여 열성적으로 문화대혁명을 이끌었던 청소년들에게도 마지막 남은 것은 정치에 대한 불신과 증오, 공포, 그리고 부모나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느끼는 비탄의 심정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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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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