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96. '세계인민의 적' 미국과의 화해 

 

60년대 중국은 소련과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 절정은 1969년 우수리 강을 사이에 든 영토분쟁이다. 한때의 동반자였던 소련이 이제는 중국을 위협하는 가장 의험한 나라로 등장한 것이다.

 

이제 중국은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의 현실적인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동반자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소련에 대항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볼 때 미국은 '세계인민의 적'이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중국은 부득이 세계에 대한 관점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중국의 변신에 중대한 계기를 미국이 제공하게 된다.


1969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이른바 '닉슨 독트린' 을 발표했다. 긴장과 대결의 냉전체제를 청산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연일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었고 미국의 경제도 해외 군사비 지출등으로 어려운 상태였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종결 및 냉전체제를 해소하고 싶었던 것이다. 닉슨 독트린으로 세계는 냉전체제에서 벗어나 긴장완화 시대, 이른바 '데탕트'의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위의 그림은 중,미의 화해는 양극화되었던 세계를 다극화로 변모시켰다. 사진은 1972년 중국을 방문한 닉슨 미대통령이 주은래와 만찬에 참석한 모습.' 

 


소련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중국과 국내외적으로 여러 어려움을 당하고 있던 미국은 서로에게 손짓하여 가까워질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1969년 소련과 중국의 국경분쟁에 대해 미국은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중국 편을 들었다. 당시 중국은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미국 사이를 두껍게 막고 있던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도는 매우 빨랐다.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던 1969년 11월에 미국함대의 대만해협 순찰이 중단되었으며 12월에는 중국에 대한 미국인의 여행제한이 완화되었다.

 

1970년 11월의 유엔총회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유엔에 받아들이고 대만을 밀어내자는 안이 알바니아에 의해 제안되어 과반수를 간신히 넘기면서 통과되었다. 다음해인 1971년 4월 미국의 탁구팀이 중국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유명한 '핑퐁외교'다. 1971년 10월 유엔총회에서 중국의 유엔가입이 승인되고 중국은 안정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대만은 유엔을 탈퇴했다.


닉슨은 파키스탄이나 루마니아의 지도자들을 통해 미국 고위층의 북경 방문가능성을 타진했고 중국은 이에 긍정적인 답을 했다. 1971년 미국의 국무장관인 헨리 키신저가 비밀리에 북경을 방문했다.

 

그는 주은래를 만나 대만과 월남을 비롯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 긴 시간 동안 회담했고 주은래는 닉슨의 중국 방문을 요청했다. 닉슨이 중국을 방문할 것이라는 발표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것은 동아시아 관계는 말할 것도 세계질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1972년 2월 '세계인민의 적'의 우두머리인 미국 대통령이 북경에 모습을 드러냈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 (상해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이 공동성명은 양국의 20여년간에 걸친 적대관계를 끝내고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우연히 또는 오산이나 오해로 인한 적대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국가들 사이의 관계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은 (협상을 통한 해결책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결의 목적과 부합되는 지역으로부터 모든 미군이 궁극적으로는 철수할 것 ) 임도 아울러 밝혀 베트남에서 철수하겠다는 의사를 보이고 있다. 중국도 (자유와 해방을 위한 모든 피압박 인민들과 민족들의 투쟁) 에 대한 지지를 거듭 밝히면서도 중국은 결코 초강대국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울러 두 나라는 (다른 국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제3국과의 협정이나 이해관계) 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밝혔는데, 이것은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이 소련과 공모하여 중국을 위협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가장 큰 걸림돌은 대만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 (상해공동성명) 에서는 아주 외교적인 언어로 (무력의 사용이나 위협에 호소하지 않고) 국제분쟁을 해결할 용의가 있음을 양국이 합의하는 문구를 넣고 있다.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대만은 이미 오래 전에 모국에 속한 중국의 1개 성) 이라고 하여 대만에 관한 문제는 어떤 다른 나라가 간섭할 권리가 없는 중국 국내의 문제임을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대만해협 양쪽에 있는 모든 중국인에게는 오직 하나의 중국만이 있을 뿐이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 라는 것을 인정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외교적인 표현이다.

 

미국은 대만을 오랫동안 지지해왔고 반공전선의 가장 철저한 우방으로 간주해왔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외교적인 표현은 중국이나 대만 어느 쪽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김으로써 대만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중국에게도 명분을 제공하는 방법이었다. 이와같이 (상해공동성명) 은 서로 합의하고 있는 부분과 아직은 합의되지 않는 양국의 견해차이를 밝히고 있다. 


이 공동성명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두 나라는 스포츠나 문화 등으로부터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로 했다. 1973년 키신저는 다시 중국을 방문, 중화안민공화국과 미국이 북경과 워싱턴에 연락 사무소를 열기로 합의했다.

 

양국의 정치가들과 민간인들의 교류는 빈번해졌으며 교역량도 급속하게 늘어났다. 냉전체제는 끝나고 세계는 바야흐로 다극화시대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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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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