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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6.15 중국사 100장면 - 65. 서구열강, 중국을 넘보다. 광동무역의 시작(1757년)

 

 

 

 

 중국사 100장면 - 65. 서구열강, 중국을 넘보다 

 광동무역의 시작(1757년) 

 

 

 

전통적으로 한족들은 세계에서 가장 중앙에 위치한 나라라는 의미로 스스로 '중국'이라고 했고, 하늘에 태양이 하나이듯 지구상에도 최고통치자인 신의 아들 '천자'는 하나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문명의 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역시 한족이라고 여겼다. 다른 민족들은 중국의 교화대상인 야만족일 뿐이었다. 모두 미개한 오랑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외국과는 향상 동등한 통상관계가 아닌 조공관계를 유지했다. 유럽인들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항로의 개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15세기 말 이후 유럽인들은 중국과의 불평등 관계를 깨고 대등한 조건에서 무역 및 국가 관계를 맺고 싶어했다. 그러나 중국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고 중국인들의 우월감 역시 쉽게 깨지지 않았다.

 

신항로 개척 이후 가장 먼저 중국과 무역관계를 맺었던 나라는 신항로 개척에 앞장섰던 포르투갈이었다. 신항로 개척 초기에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스페인)가 선두주자였는데, 에스파냐는 주로 아메리카 대륙에 세력을 확장하는 데 주력했고 아시아 쪽은 포르투갈의 무대였다.


포르투갈은 1553년 마카오를 점령하여 그곳의 관리를 돈으로 매수, 그 관리의 이름으로 땅을 사는 방식으로 그 지역을 차지했다.

 

몇년 뒤 비밀리에 땅을 넓혀 포대를 세우고 군대를 주둔시켰으며 관청을 설치하여 실질적으로 마카오를 식민지화했다. 이것이 서양세력이 처음으로 힘에 의해 중국 땅을 차지하게 된 시초다.

 

물론 중국은 포르투갈의 마카오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곳에는 계속 중국관리가 파련되고 있었다. 16세기까지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중심으로 중국과 이론을 연결하는 무역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한편 에스파탸는 1565년 필리핀을 점령했으며, 아모이 항구(하문)를 무역통상 기지로 삼았다. 1626년에는 대만의 기륭을 강제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17세기 초로 접어들면 유럽에서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른 네델란드가 아시아 지역을 장악한다. 네덜란드는 자바 섬에 바타비아(자카르타)라는 그들의 전진기지를 건설하여 동남아시아 여러섬들을 식민지로 삼았으며 중국 및 일본과 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나가사키를 연결하는 무역로가 성행했다. 1604년 대만의 팽호도를 습격했으며, 1623년에는 대만을 점령하고 안평요새를 구축했다.

 

1641년에는 대만을 놓고 네덜란드와 에스파냐가 싸움을 벌렸고, 이 싸움에서 이긴 네덜란드는 동인도 회사를 통해 대만을 약 40여년간 지배하다가 청나라 초기 정성공 세력에 의해 밀려나게 된다.


네덜란드는 영국과의 무역전쟁에서 패한 이후 그 세력이 급격하게 약해졌다. 네덜란드 세력에 대신하여 아시아 무역에서 패권은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영국은 플래시 싸움(1757년)에서 승리함으로써 인도를 독점적으로 식민통치하게 되었고 중국과의 무역에서도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서양세력들이 중국을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광동항 하나만을 열어 외국인들의 무역거래를 제한시켰다. 이것을 광동무역이라고 한다.

 

광동무역에는 허가받은 상인만이 무역을 할 수 있었는데 그들이 조직한 상인 길드를 공행이라고 한다. 이 공행은 외국과의 무역을 독점할 뿐만 아니라, 외국상인들을 관리하거나 관제를 거두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청의 관리와 외국상인들이 접촉하지 못하게 했던 것은 중국과 야만족이 대등한 관계로 만날 수 없다는 우월감의 표시였다.


광동무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나라는 영국이었다. 특히 영국이 유리하게 무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인도를 식민지화함으로써 그곳의 물자를 충분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청나라는 조공무역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고, 광동무역은 영국에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대제국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었던 영국에게 이 조공관계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영국은 청나라의 이러한 제한적인 무역방식을 벗어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무역통로를 넓히려는 영국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었다.

 

1793년에는 영국의 메카트니가 영국왕 조지 3세의 친서를 들고와 청의 황제를 만나려 했으나 거절당했으며, 대등한 무역관계의 개선 요구도 역시 거절당했다. 1802~1809년 동안 영국은 마카오를 뺏기 위해 3차례에 걸쳐 포르투갈과 싸우기도 했다.


영국은 중국에서 막대한 양의 차를 수입해가면서도 영국산 제품들을 팔아먹을 수가 없었다. 특히 차의 수입대금으로 많은 양의 은을 중국에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1820년 이후 중국에 수출하는 것은 면제품이 중심이었고 그들이 중국에서 사가는 것은 차, 약재, 도자기 등이었다.


마침내 영국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러한 관행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부당한 방법을 동원, 청나라와의 무역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꾸고자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은 아편을 몰래 청나라에 파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이러한 아편판매는 중국에게는 엄청난 문제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아편무역을 금지 시키게 되었고, 마침내는 이 문제로 인해 영국과 청나라 사이의 전쟁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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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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