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20. 수 양제, 대운하를 건설, 

양제의 중원 통치(58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503년/신라, 국화와 왕호를 정함

527년/신라, 불교 공인

612년/고구려의 을지문덕, 살수대첩에서 수군을 섬멸

  

400여 년에 걸친 분열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천하를 재통일한 사람은 수의 문제 양견이다. 그는 589년 수나라를 세우고 유능한 정치를 폈다.


604년 그 아들 광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양제이다. 일설에 의하면, 양제는 병상에 누워 있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었으며, 바로 그날 밤 아버지가 총애하던 선화부인을 범했다고 한다.




양제의 통치중 가장 두드러진 일은 대운하 건설이다. 그는 장안에서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부유한 상인들을 대거 이주케 하여, 새로운 경제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지금까지 역대 왕조들이 파놓았던 운하들을 정리, 통일하기 시작했다. 


중국대륙에는 백하, 황하, 회수, 양자강, 전당강의 5대 강이 흐르고 있다. 운하 건설은 이들 강의 지류를 연결하고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강바닥을 파내는 것이다. 


먼저 황하와 회수를 이어 황하와 백하, 끝으로 양자강과 전당강을 연결하여 중국대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데, 운하의 폭은 60m, 길이는 2천km에 달했다.


운하 곁에는 길을 닦고 가로수로 버드나무를 심었다. 그뿐 아니라 장안에서 강도에 이르는 사이사이에 40여 개의 궁전을 짓고, 황제가 탈 용선과 유람선 수만 척을 만들어 띄웠다.


대운하가 완성된 것은 공사를 시작한 지 6년 만인 611년이다. 양제는 낙양을 떠나 강도까지 순행길에 올랐다.


용선을 타고 운하를 따라 내려가니 배 젓는 사람만 8만 명이요, 꼬리를 문 배의 행렬이 무려 2백 리에 달했다. 말탄 기병이 운하 양옆의 길을 따라 호위행진하고, 형형색색의 깃발과 병사들의 갑주가 눈부신 태양 아래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지나는 5백 리 이내의 고을에 음식을 헌상토록 하여, 산해진미와 진수성찬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음식이 너무 많아 종자와 후궁들이 실컷 먹고 떠날 때는 모두 땅에 묻고 갔다고 한다.


운하가 중국사회의 교통, 경제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남쪽의 풍부한 물자가 훨씬 빠르고 안전하게 북쪽으로 대량운반되기 시작, 남북간의 경제교류가 원활해졌고, 바다로부터 대륙 중심부로 들어가는 수로가 트이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운하의 물은 관개용수로도 이용되었다.


그러나 운하건설은 몹시 어려운 공사였다. 그에 바쳐진 백성들의 피땀과 생명은  수도 없었다. 황하와 회하를 잇는 통제거 공사에 동원된 사람만 백여만 명이었다고 하니, 전체 공사에 동원된 총인원수는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듯하다.


기록에 따르면, 낙양 동쪽과 북쪽 수백km 도로변에서는 매월 인부교대가 이루어졌는데 공사에서 희생된 시체가 '도로 여기저기에 널려 있고' 운하 양언덕에도 도처에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농가는 황폐할 대로 황폐해지고 남편 잃은 여인들과 고아들의 가련하고 처참한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으며, 남정네들은 무서운 노역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팔다리를  잘랐다고 한다. 


만리 타향에서 버려진 시체로 뒹구느니 평생 불구로 살지라도 노역을 면하고자했기 때문이다. '복수복족'이란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


양제는 운하건설을 마치자마자 이번엔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친히 용선을 타고 운하를 거슬러올라가 탁군, 즉 지금의 북경에 도착,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612년 1월, 황제의 사위 우문사급 아버지 우문술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113만 8천 명의 대군이 탁군을 출발했다. 원정군은 매일 1개 군단씩 순서에 따라 떠났는데, 전군이 출발하기까지 40여일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고구려 정벌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육군은 요하를 건너 진격하고 수군은 산동반도에서 황하를 건너 패수(지금의 대동강)를 거슬러올라가 육군과 합류, 일거에 평양성을 공격한다는 작전이었지만, 게릴라식 전법으로 싸우고 도망치는 고구려군에게골탕을 먹어 수나라 군사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때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이 거짓 항복의 뜻을 보이자, 우문술은 철수를 결심, 군대를 돌렸다. 그러자 고구려군은 도처에 군사를 매복시켜 돌아가는 이들을 공격했다.



그중 유명한 싸움이 살수대첩이다. 여기서 수나라 군사 30만 5천 명 중 2천 7백 명만이 목숨을 건졌다 참패한 양제는 613년, 614년 연거푸 원정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번엔 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두 번 다 중단되었다. 


가혹한 토목공사와 연이은 전쟁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잃은 양제의 최후는 비참했다. 반란군에 쫓겨 강도로 도망친 그는 체념한 채 술과 여인들에 빠져 세월을 보냈다. 


하루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목이 참 보기좋게 생겼다만 누가 이 목을 차지하게 될지 모르겠군' 하고 중얼거렸다.


618년 3월, 양제는 그를 호위하던 친위대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주모자가 어느 놈이냐?'

'온천하가 똑같이 원망하고 있으니, 어찌 한 사람에 그치겠소?'

'천자에겐 죽는 방법이 따로 있는 법이다. 독약을 마시고 죽게 해달라'


그러나 그의 마지막 소원도 거절당하고, 양제는 친위대 장교의 손에 목을 졸려 죽어갔다. 이로써 진시황 이래 중국 대륙을 재통일, 강력한 전제국가로 군림한 수나라는 37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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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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