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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6.03 중국사 100장면 - 62. 안에는 반군, 바깥에는 적군. 명의 멸망(1644년)

 

 

 

 

 중국사 100장면 - 62. 안에는 반군, 바깥에는 적군

 명나라의 멸망(1644년) 

 

 

주원장의 건국 이후 200여년이 지나면서 명조는 안으로는 환관의 횡포와 도처에서 발생하는 민란, 그리고 밖으로는 왜구와 몽고족의 공격으로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만주지방에서 세력을 확대해 명조를 압박해오는 후금(청) 세력은 명나라가 쉽사리 막아 내기 어려운 상대였다.


명은 이 만주족과의 싸움에 엄청난 국력을 소비해야 했고, 그만큼 백성들의 고통도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의 고통이 커질수록 그 불만을 등에 엎고 반란세력들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천재지변으로 인한 기근이 심각한 지역이었던 하남과 섬서지방을 중심으로 거대한 반란세력이 형성되었다.


원래 섬서지방은 기름진 땅이었지만 잦은 가뭄으로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명의 국경수비 중심이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앙에서 군수물자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게 되자 군인들이 반란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도 이 지역의 반란세력의 지도자 중 하나였다. 이자성은 연안출신으로 역에서 일하는 천한 신부의 사람이었다. 그는 그 지역의 반란군 지도자의 한 사람인 고영상의 휘하에 들어가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의 거센 공격으로 인해 반란군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이자성도 여러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피해 다녀야 했다. 명 정부군의 공격으로 거의 숨통이 끊겨가고 있던 반란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게 한 것은 청나라였다. 명이 반란군을 토벌하는 데 국력을 소모하고 있을 때 청은 명의 수도인 북경 근처에까지 육박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명의 황제 숭정제는 하남, 섬서 등지에 있는 정부군을 청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북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군이 북경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하남, 섬서 등지의 반란군들은 다시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숨어 있던 이자성은 다시 군대를 모아 하남지역에 활동을 개시했다. 고통에 신음하고 있던 하남지역의 농민들은 이자성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자성군은 농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토지를 고르게 분배한다거나 악독한 지주의 창고를 열어 농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준다든가 하여 그들의 환심을 샀다.


이자성은 세력을 더욱 강화시켜 마침내 1641년에는 낙양을 함락시켰다. 42년에는 개봉을 점령했으며, 43년에는 양양에 궁전을 짓고 스스로 신숭왕이라 칭하고 국가체제를 갖추어나갔다. 그 이듬해 다시 나라 이름을 대순으로 하고 서안을 서경으로 삼았다.

 

서안을 거점으로 한 이자성군은 동쪽으로 군대를 이동하며 명의 요충지를 하나씩하나씩 점령해들어갔다. 마침내 3월 17일 이자성군은 북경에 당도했다. 북경은 명의 수도라고 하지만 그 수비는 너무 허술하여 이자성의 반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월 18일 저녁 무렵 황제가 가장 믿고 있던 신하가 성문을 열고 이자성군을 불러들였다. 성문이 열리자 이자성군은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황제가 머물고 있던 궁성인 자금성 주변에는 이자성군의 함성이 들리고 북경 시내는 반란군이 방화한 불길이 여기저기서 번지고 있었다.

 

숭정제는 최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명의 맥을 잇기 위해 세 아들을 피신시킨 후 왕비와 후비들에게 자결을 명한 다음, 그의 딸들은 직접 죽였다.

 

아직은 자금성 안에까지 이자성군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만수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유서를 남긴 다음 자결했다. 그가 자신의 옷깃에 적어 남긴 유서는 비장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죽어 지하에 가도 선왕들을 뵐 면목이 없어 머리털로 얼굴을 가리고 죽는다. 내 시신은 도적들에게 갈기갈기 찢겨도 좋지만 백성들은 한 사람이라도 상하게 하지 말라"


그가 이 유서를 남기고 죽을 때 그의 나이 서른 넷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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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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