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66. 만주족 지배의 전성기
강희, 옹정, 건륭(17세기 중엽~18세기 말)
청은 삼번의 난과 대만의 정씨 세력을 제압함으로써 마침내 중국을 완전히 그들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족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우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스스로 최고의 문화민족임을 자부했다. 그것은 중화의식으로 표현되었다.
문화수준이 낮은 소수의 이민족이 중국대륙을 통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고의 중국대륙 통치도 채 100여년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청은 250여년 동안 중국을 지배했다. 그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청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강희제(1662~1722), 옹정제(1723~1735), 건륭제(1736~1795) 시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삼번의 난'을 진압함으로써 중국을 최후로 통일한 시기는 성조 강희제 때다. 그는 대만의 정씨 정권을 굴복시켰으며 몽고를 공격하여 외몽고를 중국의 통치권 내에 포함시켰다.
강희제는 중국을 장악한 이후 한족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한족 지식인들을 청조의 통치체제에 참여시키고자 했다. 물론 많은 한족 지식인들은 이민족 지배하의 관리가 되기를 거부했다.
실제적으로 한족 지배층들의 참여없이 넓은 중국대륙을 통치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한족들을 관직에 등용함으로써 이민족 통치에 대한 한족의 반발을 무마하고 통치에도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강희제는 명의 관리들을 대부분 그 자리에 머물게 했다. 최고위관직까지도 한족과 만주족을 같은 비율로 임명했다. 지방행정의 대부분은 한족들에게 위임하여 명대의 지방 지배층인 향신층의 지위를 게속 인정해주었다. 문자도 만주어와 한자를 같이 사용하게 했다. 그러나 황제에게 올리는 공식문서만은 만주어로 통일했다.
또한 강희제는 전국의 학자들을 모아 대대적인 편찬사업에 참여시켰다. 그래서 만들어진 책이 중국 최대의 자전이라고 할 수 있는 <강희자전>이다. 이 자전에는 약 5만여 자의 글자가 수록되어 있다. 그외에도 <대청회전> 등 엄청난 분량의 책들이 편찬되었다. 그 때 편집된 <고금도서집성>은 1만여 권일 정도로 엄청난 대작이었다.
강희제는 8세에 즉위하여 61년 동안 황제의 직위에 있었다. 그에게는 35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황태자로 지명되었으나 잘못된 행동을 많이 하여 황태자의 지위에서 밀려났다.
그후로 청조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황제가 후계자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상자에 넣어 궁중에 보관하고 황제가 죽은 다음에 그 상자를 열어 후계자를 선포하게 했다. 이 방식은 이후 관습으로 굳어졌다.
옹정제는 황제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파벌이 형성되는 등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후계자를 지명하는 대신 상자 안에 후계자 이름을 넣어두었다가 황제가 죽은 다음에 열게 하는 방식을 정착시킨 것이다.
옹정제는 새로운 통치기루로 군기처를 만들었으며, 지방관들에게 자세한 보고를 하게 하고 직접 그 보고서를 읽고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옹정제 때에는 한족에 대한 사상탄압 정책이 가혹하게 행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 사상탄압을 '문자의 옥'이라고 한다. 즉, 글이 빌미가 되어 감옥에 가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한 것이다. 특히 만주족을 비방하고 한족의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사람은 어김없이 이 문자의 옥에 걸려들었다.
심지어는 실수로 잘못 쓴 글자로 인해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사상탄압은 만주족의 머리 모양인 변발을 강요한 것과 아울러 한족에 대한 강경책의 대표적인 예다.
예컨대 청은 한족 지식인들을 관직에 등용하거나 편찬사업에 동원하는 등으로 회유하기도 했지만, 변발을 강요한다거나 만주족을 비방하는 사상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등 이른바 '당근과 채찍' 정책으로 몽고에 비해 더 오래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 때에도 이런 청조의 정책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건륭제도 주변지역에 대한 정복활동을 계속했으며 편찬사업도 계속되었다.
이 시기의 편찬사업은 강희제 시기의 사업의 규모를 훨씬 능가했다. 이때 정리된 것이 <사고전서>다. 이것은 중국사상을 집대성한 것이다. 즉 경전, 역사서, 여러 학자들의 문집 등을 모은 것으로, 건륭제 때 10여년간에 걸쳐 정리되었는데 약 10여만 권이나 되었다.
이러한 대대적인 편찬사업은 청 황제들의 문화에 대한 애착의 결실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족 지식인들을 회유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다. 특히 전국의 서적을 모아 정리하는 것은 책들을 모두 검열하는 효과까지도 기대할수 있었다.
모은 책들을 모두 검토하여 청조의 입장에서 내용이 문제가 되는 책들은 전부 폐기처분했다. 무수히 많은 책들이 금서로 지정되었고 불에 타 사라졌다.
건륭제는 60년 만에 황제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태상황으로 물러났다. 이는 강희제의 61년을 넘기지 않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말까지 130여년간의 강희, 옹정, 건륭제 통치시기가 바로 청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미 건륭제 때부터 청조 내부에 서서히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태평성대를 지나면서 알게 모르게 관료들이 부패해가고 있었다. 건륭제 말기에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던 화신이라는 자는 건륭제가 죽은 후 처벌을 받아 처형되었는데, 그의 집에서 몰수된 재산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가 권력을 이용해 모은 보물들은 황금 15만냥 등 무수히 많은 보석류 등이 수십 개의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청나라에서 20여년 동안 거두어 들이는 세금의 양과 맞먹을 정도여서 건륭제의 아들인 인종 가경제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화려하게 꽃피던 청의 내부는 이미 썩어들어가고 있었고, 19세기 초반에 들어오면 그 부패상이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