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75. 중국혁명의 아버지 손문 

 중국동맹회 결성(1907년) 

 

 

중국대륙의 공산당이나 대만의 국민당을 포함하여 모든 중국인들에게 국부로 받들여지는 사람이 손문이다. 그의 1866년 광동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동성은 당시 서양세력들이 중국으로 들어오는 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난 1866년은 태평천국이 중국을 휩쓰다 막을 내린 2년 뒤다.


손문은 어렸을 때무터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10세 때 마을의 서당에서 공부했다. 12세 때는 형이 있는 하와이로 건너가 그곳에서 서양학문을 접하게 된다. 그의 형은 소작인이었는데 1871년에 하와이로 이민을 가 농장경영에 성공했다.

 

손문은 얼마 후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 1886년부터 의학을 공부하고 1893년에 광주에서 의사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의술을 베푸는 것보다는 중국의 현실개혁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894년 하와이로 건너가 중국혁명을 위한 흥중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홍콩에 흥중회 본부를 설치했다. 그를 비롯한 혁명가들의 목적은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국에 새로운 민주주의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해 손문과 그의 동지들은 광주에서 무장봉기를 계획했으나, 지원되기로 되어 있던 무기가 제때에 도착하지 않은데다가 사람들의 이동계획이 어긋나 봉기는 연기되었으며 몇 명의 동지들이 청조의 감시망에 걸려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손문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의본으로 피신했다. 청은 그에게 많은 현상금을 걸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해외의 중국인(화교)들에게 혁명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여행 중 영국에 이르렀을 때 청조의 공사관 관리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구사일생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여행은 또한 손문으로 하여금 서양 자본주의의 눈부신 발전, 그리고 그 사회가 안고 있는 극심한 빈부의 격차를 동시에 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고 그의 새로운 중국사회 구상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의 중심사상인 삼민주의는 이 여행에서 큰 틀이 잡혀졌다.


1895년의 혁명계획이 실패한 이후 1900년 홍콩에서 다시 혁명계획을 세워 광주와 혜주 등에서 동시에 봉기할 것을 결정했다. 영국에서 파견한 홍콩 총독, 일본에서 파견된 대만총독도 이 거사를 지원하기로 했으며 양관총독 이홍장도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홍장이 혁명세력과의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광동과 광서에서 계획된 봉기는 단행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같은 사정을 연락받지 못한 혜주의 혁명세력은 계획대로 정사량의 지도 아래 봉기, 창나라 군대와 싸워 크게 이겼다.

 

그러나 예정되어 있던 광주지역에서의 봉기가 실패하면서 정사량의 혁명부대는 고립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1개월 정도 청의 군대와 싸우다 성과없이 해산하게 되었다.


몇 차례의 지역적인 봉기실패는 혁명세력들로 하여금 보다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혁명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당시 중국 국내와 해외에는 무수히 많은 혁명조직들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단체로 호남성 출신 황흥과 송교인 등이 중심이 된 화흥회, 절강성 출신의 채원배, 장병린 등이 중심이 된 광복회 그리고 손문이 이끌었던 흥중회가 1907년 일본에서 모여 단일 혁명조직인 중국동맹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중국동맹회 회원은 중국 여러 성에서온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각 성의 조직활동 책임자기 정해졌다. 그들은 도쿄에 본부를 설치하고 기관지인 <민보>를 발행하면서 중국 내의 비밀결사조직과 연결, 무장봉기를 계획했다.


동맹회의 이념은 손문에 의해 제시된 삼민주의였다. 삼민이란 민족, 민권, 민생이다. '민족'은 민족주의적인 한족 국가를 세우는 것이고, 이는 제국주의 외국세력에 묶여 있는 청조를 타도함으러써 완성된다. '민권'은 인민들의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될 것이다. '민생'은 인민들의 안정적인 생활을 갖추어줄 수 있는 경제정책인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정책을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소유권을 고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모든 개혁세력이 이 이념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세력들은 서로 생각이 다른 부분들이 많았다.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놓고 혁명파와 입헌파로 갈라진다.

 

먼저 민족주의의 문제다. 우선 정치체제적인 문제에서 입헌파는 청조 타도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만주족의 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입헌군주제 정부를 세울 것을 구상했다. 그에 비해 혁명파는 만주족의 청조가 한족을 억압하여 외국에 굴욕적이기 때문에 이를 타도하지 않고는 진정한 개혁을 이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다음은 민권에 관한 문제인데, 예를 들어 입헌파인 양계초는 중국인민은 무지하여 공화제를 실행할 능력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입헌군주제 아니면 서양식의 계몽군주제 비슷한 것을 선호했다. 그러나 혁명파는 당연히 중국인민들의 수준에서 공화제는 가능하며 혁명운동 자체가 인민들의 민주주의적인 의식을 깨우쳐나가는 과정이라고 주상했다.


세 번째로 민생주의의 있어서 입헌파는 토지국유 및 토지개혁에 절대반대의 입장이었다. 토지소유권은 신성 불가침이기 때문에 이것을 침해하는 것은 인민들로 하여금 부자가 될 꿈을 갖고 열심히 일하려고 하는 생각을 감퇴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파는 토지가 소수에 의해 독점되는 것은 불합리하며 땅을 가진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농민들의 피땀을 빼앗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입헌파의 중심인물이 양계초 같은 지식인들이다. 그러나 입헌주의자들의 사상으로는 중국의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 손문 등은 중국동맹회로 결집하여 혁명을 꿈꾸게된 것이다.


혁명파는 1907년 이후에도 10여 회에 결치는 무장봉기를 시도했으나 모두 큰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혁명의 불길은 의외로 다른 곳에서부터 치솟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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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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