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76. 무창에서 솟은 혁명의 불길
무창봉기 발발(1911년)
손문을 비롯한 혁명세력은 1900년대 여러 차례의 무장봉기를 시도하지만 큰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혁명의 불길이 거세게 일어난 계기는 의외로 청조의 철도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철도는 건설과정의 이권이나 건설 이후 이용과정에서의 효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근대시설이었다. 중국에서의 철도는 관영으로 건설되다가 민영화 요구에 밀려 민영화되는 경우가 있었다.
제국주의 침략세력들도 철도건설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청조는 1909년 호북, 호남, 두지역의 철도부설에 필요한 경비를 외국의 차관도입으로 조달하여 건설하고자 했다. 물론 이것은 총조의 자율적인 의사는 아니었다.
이에는 서양세력들이 철도건설과 그 운영권에 개입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외국은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철도건설에 참여하려고 했던 것이다.
차관의 도입을 통한 철도건설은 곧 철도가 국유화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청조가 철도 국유화정책을 발표하자 철도건설을 추진하고 있었던 지방 실력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나 청조는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외국과의 차관계약에 서명했고 민간인 철도회사를 접수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등은 이 차관계약을 통해 호북, 호남 일대의 철도부설권을 손에 넣었고 철도가 연장되어 건설될 경우 역시 그들이 우선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철도국유화 반대운동이 여러 지역에 일어났다. 최초의 집회는 장사에서 약 1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호남성의 관리들과 철도회사는 국유화령을 취소하고 민영으로 계속할 것을 요청했으나 청조는 듣지 않고 더욱 강경한 자세를 보이며 시위대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여갔다.
광동성에서도 역시 국유화령에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사천성에서는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분노한 시위군중들은 아예 청조 타도 운동으로 그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
철도국유화 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했던 시위는 청조의 탄압에 의해 잠시 주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상황을 새롭게 몰아가게하는 사건이 무창에서 발생했다. 무창도 역시 철도국유화 반대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사천성의 시위대에 총격이 가해지면서 반발이 더욱 거세어지자 청조는 무창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사천성의 시위진압에 동원하려 했다. 그런데 무창에 있던 군대에는 이미 혁명세력이 침투해 있었다.
무창 군대 내의 혁명 중심인물들은 혁명 거사일을 1911년 10월 6일로 잡았다. 그러나 준비가 부족해 계획일이 늦추어지는 가운데 봉기 중심인물의 하나인 손무가 폭탄을 제조하다가 폭발사고가 발생하면서 혁명당원의 명부와 서류 등이 발각되어 이것이 청조에 보고되었다. 청조는 혁명계획의 주동자 체포에 나섰고 거사하기도 전에 지도부 대부분이 잡혀 총살되었다.
그러나 지도부를 잃은 혁명파 군인들은 10월 10일 밤 7시를 기해서 들고일어나 그들에 반대하는 장교들을 죽이고 무기고를 습격, 점령했으며, 다음날 호광총독 관청을 장악함으로써 무창은 혁명의 도시가 되엇다.
무창에 이어 한양과 한구의 신군이 혁명국에 합류함으로써 혁명운동은 마른 들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청은 무창의 봉기소식을 듣고 2개 사단을 보내 이를 막게 했으나 혁명군에게 격파당하고 말았다.
무창에서 시작된 혁명운동 소식은 곧 중국 전지역으로 빠르게 퍼졌으며 1달여 만에 13개 성이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하북성, 하남성, 산동성만이 예외였을 뿐이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혁명의 물결이 휩쓰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는 청의 지배에 대한 반감이 중국인민들 사이에 뿌리깊게 박혀 있었고, 혁명세력들이 군대내에 손길을 뻗쳐 조직적인 사업을 해놓은 결과였다.
한때 혁명세력이 중국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혁명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한구와 한양이 청군에 의해 함락되어 혁명세력이 위기에 차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세를 다시 혁명세력 쪽으로 돌리게 한 사건이 남경의 장악이다.
여러 성의 독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경은 여전히 청의 군사력 아래 있었는데, 이 남경이 혁명세력에 의해 장악된 것이다.
11월 15일 독립을 선언한 각 성의 대표는 상해에서 모여 대표회를 무창에 설립할 것 등을 결의했고, 무창으로 옮긴 혁명세력의 성대표들은 임시정부 구성안을 발표했다.
또한 청의 군사적인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원세개가 혁명세력에 가담한다면 그를 임시총통에 추대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원세개는 혁명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세개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당시 독립한 성의 대표들 중 상당수가 혁명파보다는 보다 온건한 입헌파가 중심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시점에서 혁명세력의 상징인 손문이 12월 25일 귀국하여 상해에 모슴을 나타냈다. 손문은 혁명세력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29일 임시대총통 선거에서 손문은 각 성대표들의 압도적 지지로 임시총통에 선출되었다.
1912년 1월 1일 남경에서 정식으로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의 혁명 정부가 선포되었다. 손문은 "인민의 공의를 취하고 중을 위해 복무한다"는 총통선서를 했다.
드디어 2천여년 동안 지속되어왔던 절대 군주제도가 무너지고 최초의 근대적인 공화정 정부가 중국에 들어서 인민들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 것이다. 남경 임시정부는 임시대총통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혁명정책을 발표하였다.
1. 아편의 재배 및 흡연 금지
2. 여성의 전족 금지
3. 가혹한 형벌의 금지
4. 인신매매, 도박의 금지
5. 천민신분의 해방
그러나 중화민국의 장래가 마냥 순탄한 길에 들어선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청나라의 신군의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인 원세개의 영향력은 아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외국, 특히 영국의 경우 민족주의적인 혁명세력이 움직이는 중화민국보다는 원세개를 중국의 대표로 세우고 싶어했다. 중국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데는 민족주의적인 혁명파보다는 민족의식이 희박하고 개인적 야심이 가득한 원세개가 훨씬 다루기 쉽다는 판단에서였다. 남경의 중화민국 정부내에도 입헌파 등은 원세개와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다.
원세개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던 혁명정부에서도 결국은 원세개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원세개는 청조를 멸망시킨다는 조건으로 남경정부의 대총통에 취임하기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청은 원세개에 혁명세력을 진압할 것을 명했지만 원세개는 더 이상 청조에 충성을 바치기를 원치 않았다. 원세개는 청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를 퇴위시키고 손문이 사임한 남경정부의 총통에 취임했다. 혁명은 다시 한걸음 후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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