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88. 아랍의 바다에 둘러싸인 유태인 섬

-제3차 중동전쟁 발발(1967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60년/4, 19혁명으로 이승만 하야

1961년/박정희, 5. 16 군사쿠데타 일으킴

1965년/한일조약 비준

1967년/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시작

  


1991년 10월 30일 오전 10시 30분 에스파냐의 수도 마드리드에 있는 팔라시오 데 오리엔테 궁에서 중동평화회담이 열렸다. 


미국과 소련이 주선한 이 회담에는 이스라엘,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레바논, 요르단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 6개국으로구성된 걸프 협력협의회 대표가 모여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해묵은 문제들을 토의했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한 이래 수차례의 전쟁을 치르며 주변 지역을 점령, 영토를 확대했다.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제3차 중동전쟁은 6일 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때 빼앗은 골란 고원, 요르단 강 서안, 가자 지구, 동예루살렘이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지역이다.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은 이곳에 거주하는 170만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자치 또는 독립문제와 맞물려 있다.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분쟁은 그 역사적 뿌리가 매우 깊다. 1880년대까지만 해도 두 민족은 평화롭게 어울려 살았다. 당시 팔레스타인 총인구 50만 가운데 유태인은 2만 5천이었다. 그런데 유럽에서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시오니즘으로 무장한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밀려들었다.


시오니즘이란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을 말하는데, 유태인들이 신성시하는 예루살렘의 산 시온에서 따온 말이다.


1896년 빈의 유태인 언론인 헤르즐은 (유태인 국가)라는 책을 집필, 유태인들이 박해를 피하려면 따로 독립국가를 세우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시오니즘의 출발이다. 유태인들은 어디다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울 것인지 찾던 끝에 팔레스타인을 선택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당 가나안'이야말로 유태국가를 세울 가장 적절한 장소라고 생각한 것이다. 1915년 10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영국은 (맥마흔 서한)을 발표했다. 


아랍이 전쟁에 협력하면 전후 팔레스타인을 아랍 인에게 돌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터키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터키는 독일 편에 가담하여 영국과 싸우고 있었다. 이에 '메카의 수호자'후세인은 영국인 로렌스의 도움을 받아 터키군을 무너뜨렸다.


그런데 1917년 영국 외상 발포어는 미국 내 유태인의 협력을 얻어 미국을 참전시키려는 목적으로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 수립을 지지한다는 이른바 (발포어 선언)을 발표했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발포어 선언을 이행하려 했다. 유태인들은 영국의 비호하에 이민을 계속, 1936년에는 총인구의 28%를 차지하게끔 되었다. 이들은  우수한 기술과 자본으로 정착촌을 건설하고 협동조합과 각종 산업시설을 갖추었다. 과격한 일부 시오니스트들은 비밀리에 군대를 길렀다.


독립의 꿈이 무산된 아랍 인들은 시오니스트와 영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테러와 파업, 시위가 잇달았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둘로 분할, 유태인과 아랍 인이 각각 독립국가를 세우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시오니스트들은 팔레스타인 전역이 유태민족의 땅이라고 주장하며, 그  제안을 거부했다.


1945년 3월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등 아랍국가들은 아랍 연맹을 결성, 이스라엘에 대항키로 했다. 이에 영국은 문제를 국제연합으로 넘기고, 철수를 선언해버렸다.


영국군이 철수하기 전에 좀더 넓은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서 양측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48년 5월 15일 영국은 마침내 철수했다. 같은 날,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 벤 구리온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했다.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한 아랍은 아랍해방군을 조직했다. 제1차 중동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고 100여 만에 달하는 아랍 인들은 하루아침에 난민이 되었다. 이들에게 이스라엘은 수많은 동족을 살던 땅에서 몰아낸 침략자요, 제국주의의 첨병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사실 이스라엘이 삼면을 포위한 아랍국가들  속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미국 내 유태인들이 보내는 성금과 미국정부의 차관 덕분이었다. 


더욱이 미국은 이스라엘을 아랍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교두보로 삼아 적극 지원했다. 때문에 이후 아랍의 반이스라엘 투쟁은 자연스럽게 반미투쟁으로 전화되었다.1964년 5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결성되었다. 아랍 연맹은 이를 팔레스타인의 유엔 대표로 인정했다.


이스라엘과 그를 전폭 지원하는 미국에 대한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의 테러, 그에 대항하는 이스라엘 군과 민병대의 보복학살, 75년부터 계속되어온 레바논 내전 등으로 얼룩진 팔레스타인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피와 눈물이 흐르는 수난의 땅'으로 변한지 오래이다. 


이 모든 중동사태의 밑바닥에는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항하는 아랍 민족주의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1974년 11월 13일 게릴라 복장을 한 PLO(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장 아라파트가 유엔총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팔레스타인 혁명운동의 투쟁목표는 유태인 개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종차별적 시온주의와 노골적인 침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혁명은  인간으로서의 유태인을 위한 혁명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혁명은 인간으로서의 유태인을 위한 혁명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유태교와 시온주의를 구별합니다. 


우리는 시온주의적 식민주의의 책동에  반대하지만 유태교의 신앙은 존중할 것입니다...나는 미국 국민들에게 묻고자 합니다. 


다시 묻노니, 팔레스타인인민이 당신들에게 저지른 범죄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당신들은 싸우려 하는  것입니까?...나는 미국과 아랍 세계 전체의 진정한 우호관계가 보다 새롭고 높은 차원에서 설정되오야 한다는  사실을 미국인들이 알아 주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전화카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