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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7.06 고사성어 - 면벽공심, 소규조수, 요동지시, 투필종융, 취이대지




면벽공심 (面壁功深)

面(낯 면) 壁(벽 벽) 功(공 공) 深(깊을 심)

오랜 수련을 통하여 깊은 경지에 이르는것을 비유한 말

  

오등회원(五燈會元) 동토조사(東土祖師)편의 이야기다. 남북조시대에 불교가 흥성하자, 많은 인도 승려들이 중국으로 왔다.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 천축국 향지왕(香至王)의 셋째 왕자인 달마(達摩)는 광동지방을 지나 양나라의 수도인 건업(建業)에 도착하였다. 달마는 건업을 떠나 북위(北魏)의 영토인 숭산(嵩山)에 있는 소림사(少林寺)에 머무르게 되었다.


달마는 소림사에서 밤낮으로 벽을 향해 앉은채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面壁而坐, 終日默然,). 그에게 무슨 오묘함이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달마가 이렇게 수행하기를 9년. 그리고 그는 죽었다.


소림사의 서쪽에는 높이가 2 장(丈)이나 되는 석벽(石壁)이 있다. 얼핏 보면 보통 돌 같지만, 대여섯 걸음 물러나서 보면, 달마가 정좌(靜坐)하고 있는 모습이나 움직이는 모습이 나타난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달마가 9년 동안 면벽하며 도를 닦아 남긴 흔적이라고 한다.


면벽공심(面壁功深)이란 오랜 수련을 통하여 깊은 경지에 이름을 비유한 말이다.

  




소규조수 (蕭規曹隨)

蕭(맑은 대쑥 소) 規(법 규) 曹(나라 조) 隨(따를 수)

전인(前人)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를 답습하는것을 비유한 말

  

한나라 양웅(楊雄)의 해조(解嘲)에 실린 이야기다. 진(秦)나라 말, 소하(蕭何)는 한고조 유방을 도와 반진(反秦)의 의거를 일으켰다. 


그는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고 한 왕조를 세우는데 공이 컸기 때문에, 흔히들 한신(韓信), 장량(張良) 등과 더불어  한흥삼걸(漢興三杰) 이라 부른다. 


기원전 206년, 유방이 진나라의 함양을 공격할 때, 병사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납치하는데 정신이 없었지만, 소하는 상부(相府)로 달려가서 지도와 법령 등 중요한 문건들을 수습했다.


훗날, 소하는 재상(宰相)이 되자, 이미 확보한 진나라의 문헌과 자료들을 토대로 전국의 지리나 풍토, 민심 등을 파악하여, 한나라의 법령과 제도를 제정하였다. 


당시 유방의 수하에는 조참(曹參)이라는 모사(謀士)가 있었다. 그는 유방의 동향 사람으로서 소하와도 관계가 매우 좋았으므로, 사람들은 두 사람을  소조(蕭曹) 라고 불렀다. 소하의 추천으로 승상된 조참은 모든 정책과 법령을 고치지 않고, 소하가 결정해 놓은 것을 따라(蕭規曹隨) 계속 집행하였다. 


소규조수(蕭規曹隨)란 전인(前人)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를 답습함을 비유한 말이다. 

  




요동지시 (遼東之豕)

遼(멀 요)  東(동녘 동)  之(-의 지)  豕(돼지 시)

요동의 돼지 라는 뜻으로, 견문이 좁아 무엇이든지 희귀하게 여기는것을 비유한 말

  

후한서(後漢書) 주부(朱浮)전의 이야기다. 동한(東漢) 말, 주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전쟁에 참가하여 약간의 무공을 세워운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공로를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여 항상 자랑하고 다녔다.


천하가 태평해지자, 주부처럼 평범한 군인들은 별 볼일이 없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요동에 갔다가, 검은 돼지가 머리털이 흰 새끼를 낳은 것을 보고 매우 희귀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머리털이 흰 돼지 새끼를 황제에게 바쳐 환심을 사고자 하동(河東)으로 갔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가서 보니 검은 돼지 뿐만 아니라 머리털이 흰 돼지는 말 할 것도 없고, 몸 전체가 흰 돼지도 엄청나게 많았다. 주부는 끌고 갔던 돼지 새끼를 바라보며, 자신의 행동에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곧장 돌아온 그는 다시는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동지시(遼東之豕)는 요동의 돼지 라는 뜻으로, 견문이 좁아 무엇이든지 희귀하게 여김을 비유한 말이다.

  




투필종융 (投筆從戎)

投(던질 투) 筆(붓 필) 從(좇을 종) 戎(되 융)

학문을 포기하고 종군(從軍)하는것을 뜻한다

  

한서 반초(班超)전의 이야기다. 동한(東漢) 초, 반고(班固)와 반초(班超) 형제가 있었다. 그들의 집안은 서한 말의 시대적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점차 빈곤해지기 시작했다. 


형 반고가 낙양(洛陽)에서 관직을 맡게 되자, 동생 반초도 어머지와 함께 낙양으로 왔다. 낙양에서는 생활이 어려웠으므로, 반초가 관청에서 문서를 베껴주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당시 북방의 흉노들은 끊임없이 한나라의 북쪽 변경을 침입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반초는 문서를 베끼다가 변방을 안정시켰던 역사적인 인물들을 생각하고, 마음이 괴로웠다. 그는 홧김에 붓을 내던지면서 외쳤다.


대장부는 큰뜻을 품고 나라의 변방을 안정시키는 일을 해야 하거늘 어찌 하루종일 붓만 들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곧 군에 입대하여 흉노 정벌에 큰 공을 세웠으며, 41세 때에는 서역으로 가서 흉노의 세력을 제거하였다. 31년 후 그는 백발 노인이 되어 귀국하였다. 


투필종융(投筆從戎) 이란 학문을 포기하고 종군(從軍)함을 뜻한다.



  


취이대지 (取而代之) 

取(취할 취) 而(말 이을 이) 代(대신할 대) 之(그것 지)

지위나 물건을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물로 대신하는것을 뜻한다.

  

사기 항우본기(項羽本紀)의 이야기다. 진(秦)나라 때, 초(楚)나라의 귀족이었던 항량은 조카 항우(項羽)가 학문을 하거나 무술을 연마해 주기 바랬다. 


하지만 항우는 숙부인 항양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글 공부는 자기의 이름을 쓸 줄 알면 족하고, 검법은 한 사람만을 상대하는 것이므로 배울 가치가 없습니다. 저는 만인(萬人)을 대적하는 일을 배우겠습니다. 


항우가 20세 되던 해, 숙부 항량은 사람을 죽이고 오중(吳中)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진시황(秦始皇)은 6국을 통일하고 자신의 위업을 과시하기 위해 전국을 순시하고 있었다. 


항량과 항우가 오중에 있던 그 해, 마침 진시황도 그곳에 오게 되었다. 사람들 속에 끼어 진시황의 행렬을 지켜보던 항우가 항량에게 말했다. 저 사람의 자리를 제가 대신할 것입니다(彼可取而代也).  


취이대지(取而代之)란 지위나 물건을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물로 대신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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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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