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39. 생존자는 단 18명 

마젤란 일행, 세계일주 성공(1519-1522)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519년/을유사화로 조광조 처형됨

  

1519년 9월 20일 마젤란은 5척의 배와 227명의 선원을 이끌고 에스파냐를 출발했다. 그는 포르투갈 인이었지만 에스파냐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항해목표는 동방으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대륙이 인도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 대서양을 건너 인도로 가려는 노력은 다시금 전개되고 있었다.


3개월이 지난 12월 13일, 일행은 남아메리카 지금의 리오데지네이로에 도착했다. 원주민들은 이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그래서 이들이 떠날 때는 눈물을 흘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1520년 4월 2일에는 선원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5월에는 산디아고 호가 난파를 당했다. 게다가 11월에는 성 안토니오 호가 도망을 치고 말았다. 


어려움 속에서도 항해를 계속한 마젤란 일행은 11월 28일 남아메리카의 최남단에 도착했다. 대륙과 섬 사이의 좁은 해협을 무사히 건넌 이들은 이 해협에 (마젤란)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제 그들 앞에 놓여진 것은 처음 보는 커다란 바다였다. 대서양에 비해 너무도 잔잔한 이 바다를 보고 마젤란은 '태평양'이라 명명했다. 마젤란 일행은 태평양을 직접 눈으로 본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마젤란 일행은 태평양을 북서진하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항해였다. 보이는 것은 천지에 가득 찬 물뿐 어디에도 육지는 없었다. 식량은 다 떨어지고 괴형별이 돌아 선원들이 하나 둘씩 쓰러졌다. 


이듬해 3월 일행은 드디어 육지를 발견했다. 망망대해를 떠돌아 다닌 지 무려 4개월 만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지금의 마리아나 군도였다. 4월, 필리핀에 도착한 이들은 원주민에게 식량제공과 기독교로의 개종을 요구했다. 만일 반항하면 가차없이 죽여버릴생각이었다. 


처음엔 친절히 이들을 맞이했던 원주민들은 이들이 너무 거칠게 나오자 저항하기 시작했다.  '대포와 화승총의 위력을 보여주자.'


원주민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지리를 십분 이용한 전술로 마젤란 일행을 공격해왔다. 전투는 원주민의 승리로 끝이 났다. 마젤란은 이 전투에서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나머지 선원들은 두 척의 배에 나눠타고 급히 도망쳤다. 두 척의 배는 항해를 계속하기로 했다. 이들이 찾고 있던 것은 향료가 나는 나라였다. 그러나 지휘자를 잃은 이들은 해적으로 돌변, 중국 무역선을  공격하여 향료를 비롯 값진 물건들을 몽땅 빼앗았다. 


1522년 9월 6일 에스파냐의 세빌랴에 낡은 배 한 척이 도착했다. 이름은 빅토리아 호,  3년 전 마젤란이 인솔하여 떠났던 5척의 배 중의 하나였다. 이 배는 아프리카를 도는 머나먼 항해 끝에 마침내 출발지로 돌아온 것이다. 


277명의 승무원 중 살아 돌아온 자는 단 18명, 그러나 이들이 싣고 온 향료는 워낙 값이 비싸 항해비용을 충당하고도 남았다. 마젤란 일행의 세계일주 성공으로 유럽 인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새 항로의 발견은 유럽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이 쏟아져들어와 에스파냐는 유럽의 대국으로 급성장했다. 


금과 은이 유럽 전역으로 유출되어 물가가 폭등, 이른바 가격혁명이 일어났다. 봉건 영주나, 농민, 임금생활자들의 생활은 어려워진 반면, 상공업자들은 더욱 부유해졌다. 


상공업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국왕은 상공업을 보호 장려하고, 해외 식민지 개척에 적극 나섰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그 선두주자였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나타났고 이어서 더 동쪽으로 나아가 말라카즈 군도에 이르렀다. 말라카즈 군도는 향료의 집산지로서 말라카 제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1511년 말라카즈를 점령하고 향료무역을 독점했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향료와 동방산물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한편 에스파냐는 뜻밖에 아메리카를 발견, 막대한 이득을 취한 다음 남아메리카를 돌아 태평양으로 나왔다. 그리고 1565년 필리핀 제도를 점령한 뒤 역시 말라카즈 군도에 도착했다. 


유럽의 해외무역은 약탈에 가까운 것이었다. 유럽은 막대한 이익을 취한 반면 아시아와 아메리카 원주민은 삶의 터전을 파괴당했다. 


신항로는 세계를 하나로 잇는 데 기여한 바 컸으나, 그 주도권이 유럽 인에게 있었으므로 세계역사는 당분간 유럽 인에 의해 주도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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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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