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58 변방, 바다에서 밀려드는 오랑캐
북로남왜의 화(16세기 중엽~16세기 말)
명의 멸망을 재촉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외적의 침입이었다. 북족에서는 몽고족이, 남쪽에서는 왜구가 명을 침략하여 국가 존립을 위협했던 것이다. 이것을 '북로남왜의 화'라고 한다.
북방의 몽고적은 오랫동안 중국을 위협한 세력이었으며, 원나라로 중국대륙을 100여년간이나 지배했다. 명의 건국과 함께 북쪽으로 밀려난 후에도 몽고족의 중국에 대한 위협은 계속되었다.
'토목의 변'은 몽고족의 일족인 오이라트의 에센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한 세력에게 명군이 패배하고 명 황제 영종이 사로잡힌 사건이었다. 토목의 변 이후 에센은 1451년 주변 몽고세력을 통합하여 칸의 지위에 올랐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그 뒤 오이라트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타타르의 다얀이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하면서 다시 한번 몽고 전체를 통일하면서 칸의 자리에 올랐다. 다얀 칸의 손자였던 알단이 칸의 지위에 오른 후 1541년(가정21년) 알단 칸은 제2의 쿠빌라이가 되겠다는 야심을 실행에 옮겨 중국을 침공해들어왔다.
그들은 삭주를 거쳐 하북지방 깊숙이 침투,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고 2백여만 마리의 가축을 약탈해갔다. 그후에도 타타르의 침략은 연례행사로 되풀이되어 명나라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1550년의 침입 때에는 북경을 포위공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중국 각 지방의 원군이 모여들어 북경의 함락만은 간신히 면했다.
북경에 대한 포위공격이 있은 이듬해 1551년, 명에서는 타타르와의 타협의 한 방편으로 몽고와의 말 거래를 허용했다.말 시장을 열어 몽고의 말을 사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원래 명나라에서는 명나라의 책봉은 받은 나라에 한해 조공무역을 허락했는데, 이는 형식적으로 몽고족이 명나라의 책봉을 받아 조공국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 몽고가 중국에 말을 팔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명나라로 보아서는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을 사야 하게 된 것을 의미했다.
결국 형식적인 책봉관계를 맺으면서 몽고가 명나라에게 말을 팔 수 있게 됨으로써 몽고는 유목민의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말 판매지를 확보하게 되었고, 명은 몽고의 침략 위협으로부터 어느 정도 한숨을 돌릴 수 있는 타협이 이루어진 것이다.
몽고는 말 무역의 특권을 확보하면서 몽고족들의 생활기반을 어느 정도 안정시켰지만, 현실에 안주하게 되는 조건이 만들어짐으로써 그들의 대외팽창 의지를 잠재우게 되어 나중에 만주족에게 대륙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 몽고족과 함께 명나라를 괴롭힌 또 다른 세력은 일본 왜구였다. 이들은 원 말기부터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일본과 명은 처음에는 친선관계를 유지했다.
중국의 해안에 왜구가 출몰하게 된 근본적인 배경은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12~14세기), 무로마치 막부시대(14~16세기)의 상공업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국내의 상업활동만으로 일본의 상업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까지 그들의 활동범위를 넓혀간 것이다.
명 태조 주원장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구를 단속해줄 것을 요청했다. 영락제에 이르러서 공식적인 무역이 시작되었다.
공무역이 이루어지게 되면 당연히 밀무역은 금지된다. 명의 경제 때 일본의 아시카가와 관계를 맺고 왜구의 출몰을 막아줄 것을 일본에 요구하기도 했다.
아시카가 통치 시기에 일본국왕은 명과 조공국의 관계를 맺게 된다. 이는 아시카가 정권의 중국과의 무역을 공무역 형태로 독점하고자 하는 의도였으며, 그 독점효과를 최대화 하기 위해 사무역은 당연히 금지되었다.
그후 잠시 왜구의 출몰이 줄었으나 아시카가 막부가 세력이 약해져 왜구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면서 다시 왜구들의 횡포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왜구들이 약탈에 나서게 된 요인은 중국의 제한된 조공무역 때문이었다.
명이 일본에게 허용한 조공무역은 극히 제한되어 특권계급들에게 한정된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지방호족들이나 상인들은 이러한 조공무역의 혜택을 볼 수가 없었고, 양국 상인들간에 밀무역이 싹틀 소지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막부가 세력이 약해져 지방세력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지방의 실력자들이 독자적으로 중국과 무역거래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와의 무역거래량은 한정되어 있는 데 반해 일본의 욕구는 넘침에 따라 문제가 발생했다.
어느 해 일본 지방세력의 하나인 오우치 쪽에서 배 3척을 중국에 파견했는데, 다른 실력자였던 호소가와 쪽에서 보낸 배가 거의 동시에 광동에 입항하게 되어 두 세력들간에 선상에서 집단 난투극이 벌여졌고, 일부 일본인들이 배에서 내려 명의 영파 등 해안지대를 약탈, 파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명 정부의 조공무역 체제 아래서는 밀무역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고, 실격자들간의 쟁탈전 및 밀무역이 성행하게 된 것이다. 명은 당연히 밀무역자를 색출하여 처벌하게 되고, 그에 반발하여 중국 상인들 및 일볼인들이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기도 했다.
1533년(가정31년) 한 무리의 왜구들이 동남해안을 따라 절강, 항주, 안휘성 등 강남지방의 성들을 차례로 휩쓸면서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살인과 약탈을 서슴지 않았다. 왜구 무리들은 80여 일동안 약 4천여 명의 농민들을 살해했다. 당시 왜구들의 잔인한 행위는 다음과 같이 묘사될 정도였다.
"곡식창고를 약탈하고 민가에 불을 질렀으며 백성들을 죽였다. 시체와 피가 산과 강을 이룰 정도였다. 어린 아이를 기중에 묶어놓고 끊는 물을 끼얹는 것을 놀이삼아 했으며, 임신부를 보면 뱃속에서 태아를 끄집어내는 등" 이처럼 왜구들의 잔학상은 조선에서나 중국에서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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