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26.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낳는다.

유럽 각지에 도시 발달(10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926년/발해, 거란에 멸망

935년/경순왕, 고려에 귀의, 통일신라 멸망

936년/후백제 멸망하고 고려, 후삼국 통일

  

함부르크, 아우구스부르크, 룩셈부르크 등 유럽의 유서깊은 도시에는 '부르크'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곳이 많다. 이는 독일어로 '성곽'이라는 뜻이다.


중세 도시는 이름 그대로 두터운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문을 들어서면 교회와 광장이 있고 그를 중심으로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구불구불한 좁은 길가엔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의 가게와 살림집을 겸한 집들이 들어차 있다. 


비나 눈이 오면 포장 안된 길들이 온통 진흙탕으로 변하고 소나 말, 돼지들이 아무 때나 길가로 튀어나온다. 쓰레기와 상하수도도 심각한 문제. 몇 개 안되는 공동우물로 상수도를 해결하고 하수도는 얕고 좁은 도랑뿐이다.'


이것이 중세 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중세 도시는 10세기경 인구가 증가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유럽 각지에서 생겨났다. 도시의 기원을 섦ㅇ하는 데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어느 것이든지 상업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처음엔 상인들이 모여 임시로 거주하며 장사를 하는 곳이었다. 이런 곳은 대개 로마 시대 이래 내려오는 고대 도시의 외곽지역이었다. 교통이 편리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장사하기에 알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상인들은 임시 거주지 주변에 새로운 성곽을 쌓고 영구히 거주하며 장사를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들은 부르주아라고 불리어졌다. 오늘날 자본가를 뜻하는 말인 부르주아는 바로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도시가 제일 먼저, 그리고 활발히 발달한 지역은 발트 해 주변의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북유럽이다. 처음엔 도시 역시 영주의 지배하에 있었다. 영주는 시장세, 거래세, 통과세 등 각종 세금을 징수할 수 있고, 또 도시가 생기면 땅값도 올랐기 때문에 도시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상인들은 영주에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었지만, 주변 농촌에서 이주해온 수공업자나 날품팔이 노동자는 여전히 농노 신분이었다. 


이들은 상업활동에 필요한 온갖 일들, 예를 들면 수레나 상자의 제조, 상품 선적과 수송 등에 종사했으며, 도시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제빵업자, 양조업자, 대장간, 푸줏간 경영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상인과 함께 이들 수공업자들은 도시주민의 핵심을 이루었다. 


상공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날로 번창하자 도시민들은 영주의 불필요한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영업의 자유'를 얻고자 했다. 영주로부터의 독립, 즉 자치권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시민들은 혹은 돈으로 혹은 무력으로 자치권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신분의  자유, 영주가 만든 법이 아니라 도시법과 상법에 의해 운용되는 자신들의 재판소, 각종 세금과 봉건적 강제의 면제, 자치권을 따낸 도시민들은 문자 그대로 '자유인'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정기관과 재판소를 만들고  법을 제정하여 질서를 유지했으며  군대를 길렀다. 수입에 따라 공평하게 비용을 부담, 도시를 운영해나갔다. 


13세기경에는 거의 모든 도시가 자치권을 획득, 영주로부터의 독립을 실현했다. 이젠 비록 농노 출신이라 하더라도 영주에게 붙잡히지 않고 '1년과 하루'를 도시에 거주하면  누구나 자유인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서부터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낳는다.'는 말이 생겨났다. 시민들이 자신이 사는 도시에 갖는 애착심은 대단했다. 도시는 시민의 고향이자 국가이고 삶의 공동체였다. 


민족이라든가 국민이라는 관념보다는 자기 도시의 시민이란 관념이 훨씬 강했다. 이런 생각은 한편으론 퍽 배타적이어서 타도시 사람들은 '이방인'으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도시 당국은 무엇보다 자기 시민의 이익과 권리를 보호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다른 도시미이 자기 도시에 와서 상업활동을 하는 것을 엄격히 통제하고,  대내적으로는 시민 공동의 복지를 위해 경제통제를 가했다. 이 같은 경제통제의 한 형태가 바로 길드이다. 


철저한 주종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중세 봉건사회에서  도시는 분명 이질적인 집단이었다. 경제 외적 강제를 모두 벗어버리고 경제 원리에 입각해 생활하는 시민들은 농노나 영주와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었다. 바로 여기서 근대사회로 가는 맹아가 싹트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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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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