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28. 하나님 원하신다!
- 십자군 전쟁(109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097년/주전도감 설치
1107년/윤관, 여진 정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십자군 전쟁처럼 성스러운 이름에 가장 세속적인 욕망이 결합된 전쟁은 없으며, 신의 이름을 빌어 약탈과 살인, 만행이 판을 친 전쟁이 없을것이다.
전쟁의 발단은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 기독교인, 이슬람인 공통의 성지였다. 유대인에게는 다윗의 우물이 있는 어머니 도시요 기독교도에겐 예수가 죽어 부활한 곳, 이슬람 교도에겐 마호메트가 머무른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인들은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셀주크 투르크 족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부터 기독교인의 성지순례는 금지되었다.
셀주크 투르크족은 중앙 아시아에서 일어난 민족으로서 열렬한 이슬람 교도가 되어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었다.
위협을 느낀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우르반 2세는 이것이 비잔틴 교회를 로마교회에 복속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1095년 11월 우르반 2세는 클레르몽에서 회의를 개최,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병을 제창했다. 웅변술이 뛰어났던 그는 성지 예루살렘을 잃은 기독교도들의 비참한 생활과 투르크 족의 위협을 설명하고, 이슬람의 승리는 기독교 세계의 불명예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 전쟁은 성전이며, 전사자는 모두 천국에 가서 그 보상을 받을 거라고 역설했다. 그뿐 아니라, 동방엔 금은보화가 깔려 있고 아리따운 이슬람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며 제후들의 욕심을 부채질했다. 교황의 웅변에 감격한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하나님이 이를 원하신다!'
1096년 제1회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났다. 십자군은 안티오크를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었다. 이 무렵 '마라의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 출신의 기사 보에몽이 이끄는 십자군 부대는 마라 성에 도착하여 목숨이 아까운 자는 궁전 안으로 피난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런 다음 성안으로 진격, 닥치는 대로 약탈과 살륙을 자행했다.
사라센 인이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으므로 성안은 시체로 뒤덮여 산을 이룰 지경이었다. 게다가 궁전에 피난하고 있던 사람들까지 공격해서 소유물을 빼앗고 살아남은 자는 노예로 팔아버리고 말았다.
마라에 머문지 1개월, 식량이 떨어지자 사라센 인을 죽여 톱으로 배를 갈라보기도 했다. 사라센 인들이 금은보화를 삼켜 뱃속에 간직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들은 또한 죽은 사라센 인의 고기를 요리해 먹기도 했다.
십자군의 약탈과 만행은 비단 마라에서만이 아니었다. 어쨌든 이들은 남하를 계속, 1099년 6월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예루살렘 전투는 6주일간 계속되었다. 여기서도 십자군은 적군은 물 론 주민들까지 무차별로 죽이는 잔학성을 보였다. 십자군에 종군했던 남프랑스 출신 성직자의 기록을 보자.
'거기엔 너무도 처참한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큰 거리와 광장엔 사람의 머리며 팔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군은 시체를 아랑곳하지않고 전진했다. 신전과 벽들은 물론 기사가 잡은 말고삐까지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성지순례를 방해했던 자들로 더럽혀졌던 이곳이 그들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할 뿐 아니라 찬양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십자군의 대량학살은 신의 심판이요 영광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성지탈환에 성공한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왕국을 세우고 개선했다. 그러나 곧다시 이슬람에게 예루살렘을 빼앗겼고, 교황은 연달아 십자군을 파견했다.
십자군 원정은 총 8차에 걸쳐 일어났는데 그중 성지탈환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제1차 원정 때뿐이었다. 나머지는 어처구니없는 탈선행위로 일관했고 심지어는 엉뚱하게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 라틴 제국을 세운 일도 있었다.
1212년 제5차 십자군, 이른바 소년 십자군은 상인들과 결탁한 선주의 농간으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끌려가 사라센 인에게 노예로 팔렸다. 사라센 인들은 700명에 달하는 이 소년들을 다치지 않고 모두 해방시켜주었다.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이 났다. 그 결과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와 교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믿지 않게 되었다. 전쟁에 참가했던 영주와 기사들은 영지를 돌보지 않은 탓에 수입이 줄고, 참가비용을 조달하느라 가산을 탕진하여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반면 눈에 띄게 세력이 커진 것은 국왕과 상인들이었다. 상인들은 전쟁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으며, 국왕은 교황과 제후들을 누르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들 신흥 상인층과 손을 잡았다.
십자군 전쟁은 중세사회가 지닌 힘을 분출시킨 사건인 동시에 봉건제도의 기초를 뒤흔들어 다음에 올 새로운 사회질서를 준비하는 서곡이기도 했다.
'알쓸신잡 > 세계사 100장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사 100장면 - 32. 잔 다르크, 오를레앙을 구하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1339-1453) (0) | 2019.11.14 |
---|---|
세계사 100장면 - 31. 유럽을 휩쓴 공포의 흑사병. 흑사병 창궐(14세기) (0) | 2019.11.13 |
세계사 100장면 - 30. 칭기즈칸, 세계제국을 세우다. 몽고 통일, 중앙아시아 원정(1206-1227) (0) | 2019.11.12 |
세계사 100장면 - 29. 중세문화 꽃, 대학. 대학의 성립과 발달(12세기) (0) | 2019.11.11 |
세계사 100장면 - 27. 눈밭에서 맨발로 애원한 황제. 카노사의 굴욕(1077년) (0) | 2019.11.09 |
세계사 100장면 - 26.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낳는다. 유럽 각지에 도시 발달(10세기) (0) | 2019.11.09 |
세계사 100장면 - 25. 반은 노예요 반은 농민, 봉건제도의 완성(10세기) (0) | 2019.11.08 |
세계사 100장면 - 24. 게르만 족, 유럽을 석권하다. 서로마 제국의 부활(800년) (0) | 2019.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