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31. 유럽을 휩쓴 공포의 흑사병
-흑사병 창궐(14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302년/충렬왕, 원을 방문하고 통혼관계 성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문학작품으로 '데카메론'이란 소설이 있다. 이탈리아인 보카치오가 쓴 이 책은 무서운 흑사병을 피해 외딴 시골로 도망친 열 명의 남녀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이야기 내용은 하나같이 성직자와 봉건귀족들의 도덕적 타락에 관한 것들이다.
14세기 중엽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중세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커다란 사건이다. 흑사병이 언제 어디서 발생했는지 정확히 알수 없다. 당시 사람들은 아시아나 이집트에서 생겨 유럽으로 전염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 밝혀진 바에 의하면, 1346년경 크림 반도 남부 연안에서 생겨나서 무역항로를 따라 흑해를 거쳐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에 상륙했다고 한다.
흑사병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퍼져갔다. 1347년 이탈리아를 강타하고 같은 해 말 마르세유와 아비뇽에 이르러 1348년에는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다.
1349년에는 영국을, 이어 1350년에는 북 부 유럽을 거쳐 아이슬란드와 러시아에까지 이르렀다. 그뿐 아니라 이집트, 북아프리카, 중앙 아시아를 거쳐 중국까지 퍼져나갔다.
흑사병이 이렇게 빨리 전염된 것은 활발한 무역활동으로 인한 잦은 왕래와 도시의 불결하고 비 위생적인 환경, 병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 때문이었다.
흑사병은 페스트의 일종으로 폐에 병균이 침입하는 폐 페스트를 일컫는다. 일단 감염되면 별안간 고열이 치솟고 피를 토하며 호흡 곤란을 일으켜 정신을 잃는다. 대개 발병한 지 24시간 내에 사망하고 마는데, 사망 직전에 환자의 피부가 흑색 또는 자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흑사병이라고 불리었다.
페스트의 발병원인은 물론 치료법도 몰랐던 당시 사람들은 갑자기 쓰러져 헛소리를 하다가 순식간에 죽어버리는 환자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시체와 환자가 쓰던 물건을 불태우는 것만이 유일한 예방책이었다.
환자가 발생한 집은 병균이 못 나오게 한다고 문을 닫아걸고 못질을 하거나 불을 질렀다. 때문에 산 채로 불타죽는 환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방법도 소용없었다. 흑사병은 사람이건 짐승이건 가리지 않고 생명체는 닥치는 대로 쓰러뜨렸다.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에 싸여 하나 둘 도시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병균이 떠다니는 공기를 직접 대하지 않으려고 흰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환자를 위로하고 죽은 영혼을 달래줄 의무를 지닌 사제, 수도원장 등 성직자들도 죽음의 흑사병을 피해 그 대열에 끼었다.
흑사병에 대한 공포는 사람들을 광기와 미신에 사로잡히게 했다. 어떤 사람은 악마가 공기를 더럽혔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약초를 태우거나 나무의 액을 구해서 마셨다. 또 어떤 사람은 하늘이 내리는 천벌이라고 믿으며 기도를 하면서 죽음을 기다렸다.
파리 대학 의학부는 토성과 목성이 겹치는 천체이변의 결과라고 공식 발표를 했다. 유언비어가 횡행하고 사람들은 난폭해졌다. 누군가 물에 독을 탔기 때문에 흑사병이 생긴 거라는 소문이 나돌자 사람들은 그 범인으로 유대인을 주목했다.
유대인은 이교도인데다가 상술이 뛰어나 돈을 너무 잘 벌었기 때문에 평소부터 사람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다. 소문이 퍼지자 수많은 유대인들이 생매장당하거나 산 채로 불 속에 던져졌다.
유대인 학살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이를 염려한 교황 클레멘스 6세가 학살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지만, 뭔가 불만해소의 출구를 찾고 있던 사람들에게 아무런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미신과 사이비 종교집단이 활개를 쳤다. 신이 노한 탓이라면서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고행을 해야 한다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알몸으로 찬송가를 부르며 십자가와 못이 박힌 가죽채찍을 들고 마을과 도시를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살점이 찍히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자신의 알몸뚱이를 채찍질해댔다. 이 사이비 종교집단은 흑사병과 함께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등지로 퍼져나갔다.
흑사병은 도시와 농촌, 신분 계급의 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아비뇽에서는 추기경의 절반이 쓰러졌다.
온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흑사병은 1348년을 고비로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럽 인구는 3분의 1로 줄어들어 있었다. 파리 시는 인구 15만 중 5만을 잃었다.
유럽 인구가 흑사병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17세기에 이르러서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때 죽어갔는지 알 수가 있다.
흑사병의 창궐은 유럽 인의 사기를 땅에 떨어뜨린 사건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백년전쟁, 장미전쟁 등 장기간에 걸친 전쟁이 겹쳐 서양의 중세는 서서히 그 막을 내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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