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80. 대도하의 영웅들

-중국 홍군, 대장정 시작(193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34년/부산-장춘 간 직통열차 운행 개시



대장정,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사건의 클라이맥스는 대도하횡단이다. 이곳을 무사히 건너느냐 못건너느냐에 중국 홍군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만약 이곳을 건너지 못하면 홍군은 자그마치 2천 리 길을 되돌아가야 하고, 그것은 곧 홍군의 전멸을 뜻했다.


1935년 5월 임표가 이끄는 제1군단의 선봉대가 대도하에 도착했다. 국민당의 장개석은 홍군의 도강을 저지할 목적으로 배를 모두 불태우고 들판의 곡식까지 남김없이 거둬들였다. 선봉대는 남아 있던 세 척의 배를 배앗는 데 성공했다. 


빼앗은 세 척의 배로 1군단 병력이 강을 건너는 데만 사흘이 걸렸다. 홍군은 속속 강가로 집결했다. 그러나 물살은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이런 속도라면 도하작전을 끝내기 전에 적에게 포위당하고 말  형편이었다. 


임표,주덕, 모택동, 주은래, 팽덕회 등은 급히 군사회의를 열고 서쪽 4백 리 지점에 있는 노정교를 점령하기로 했다. 노정교는 수세기 전 노정이란 사람이 설치한 것으로 깎아지른 덧한 협곡 사이에 매달린 다리였다.


홍군은 지체없이 출발했다. 수백 길까지 솟았다가 강 수면 높이로 낮아지는 험한 협로였다. 이미 강을 건넌 부대도 함께 이동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이들은 서로 격려하듯 발길을 재촉했다. 


때론 서로의 외침이 들릴 만큼 가까워졌다가 때론 영영 헤어지는 건 아닐까 두려워질 정도로 멀어지는 협곡을 타고 홍군은 쉬지 않고 행군했다. 밤이면 이들은 든 1만 개의 횃불이 강 수면을 꽃처럼 아름답게 수놓았다. 


휴식은 10분뿐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홍군은 이 작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는 정치지도원의 강의에 귀를 기울였고 서로를 격려했다. 망설임도 피곤도 있을 수 없었다. 팽덕회는 병사들을 독려했다.


'승리는 곧 삶이요 패배는 죽음이다'


마침내 다리에 다다랐다. 강물은 깊고 물사이 매우  빨랐다. 노정교는 길이 약 900미터, 16개의 육중한 소고리줄이 강을 가로질러 뻗어있고  바닥에 두꺼운 널빤지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적이 벌써 바닥판자의 절반 이상을 들어내버린 후였다. 강의 중간지점까지는 쇠사슬만 노출된 채였다. 


더욱이 강 저편에는 적의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고 그 뒤로 1개 연대 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홍군이 미치지 않았다면 쇠줄만 밝고 이 다리를 건너진 않을 거라고 적은 생각했다. 그런데 홍군은 바로 그 미친 것을 하고야 말았다.


돌격대로 30명이 자원을 했다. 이 용감한 전사들은 쇠줄에 매달려 넘실거리는 강물 위로 나아갔다. 맞은편 언덕에서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맨앞잡을 섰던 홍군이 총에 맞고 강물로 떨어졌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운명을 같이했다. 그러나 다른 용사들은 좀더 전진했다. 드디어 바닥판자가 있는 곳까지 다다른 용사들 중 하나가 수류탄을 적의 기관총 진지에 던져넣었다. 적은 판자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그러나 20여 명의 홍군 용사들은 차례로 수류탄을 퍼부었다. 그때였다. 강기슭에서 기쁨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홍군 만세! 혁명 만세! 대도하의 영웅들 만세!'


적이 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돌격대는 타오르는 불길을  뚫고 다리위를 전속력으로 달려 적의 기관총 진지로 뛰어들었다. 그동안 홍군 병사들이 몰려들어 불을 껐다. 도중에 적과 교전하느라 지체했던 1사단도 이때 도착, 측면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적은 전면도주했다. 그중 100여 명이 헝군에 합세해왔다.


몇 시간 후 홍군의 전병력은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다리를 건넜다. 대도하의 영웅들에게는 홍군 최고의 영예인 금성훈장이 수여되었다.


홍군이 대장정을 시작한 것은 1934년 10월 16일이다. 손문이 제1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킨 후 숙원사업인 군벌타도를 실천에 옮기지 못한 채 벼응로  죽자, 장개석이 총사령관이 되어 북벌을 지휘하게 되었다.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은 갑자기 총부리를 함께 싸워온 공산당에게 들이댔다. 지주, 대자본가, 상인 들의 지지를 받던 그는 북벌이 성공을 거두자 사회주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국공합작을 파기한 것이다. 이 4.12구데타로 공산당원의 5분의 4가 살해당하여 1만명 정도만 살아남았다.


그후 공산당은 정강산을 근거지로 하여 강서 소비에트를 세우고 세력을 키웠다. 장개석은 총 5차에 걸쳐 토벌전을 전개했다. 1933년 10월 시작된 제5차 소공전은 막대한 물자를 동원한 봉쇄작전이었다.


소비에트는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소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국민당 기관지는 강서 소비에트 탈환 과정에서 100여만 명이 살해당하거나 굶어죽었을 거라고 보도했다.


그러자 1934년 1월 서금에서 소집된 제2차 전중국 소비에트대회는 혁명 본거지를 서북 내륙지방으로 퇴각시키는 문제를 검토했고, 드디어 10월 16일 장정을 개시한 것이다.


장정은 1년 만인 1935년 10월 끝이 났다. 그동안 홍군은 중국 대륙을 남쪽으로 반 바퀴 돌면서 2만 5천 리, 즉 1만킬로미터를 걸었다. 이는 미국 대륙을 두 번 횡단하는 거리이다. 


홍군은 18개의 산맥을 넘고 24개의 강을 건넜다. 그중 5개 산맥은 만년설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12개 성을 지나면서 62개 도시와 마을을 점령했으며 6개의 이민족 지역을 통과했다.  


정강산에서 섬서성 연안까지 이른 장정을 완수한 사람은 열명 중 하나 꼴이었다. 그 가운데 여성은 35명뿐이었다. 모택동의 두 번째 아내 하자정은 임신한 몸으로 장정을 완수했다.


그러면서도 홍군은 가는 곳마다 농민의 지지를 얻어 소비에트를 건설했다. 농민들은 더 이상 홍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는 훗날 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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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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