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81. 노구교 사건
-중, 일정쟁 발발(1937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36년/손기정, 베를린 올림픽 대회 마라톤 우승. 일장기 말소 사건
1938년/한글 교육 금지됨
1937년 7월 7일 밤 10시 30분경, 북경에서 남서로 6km 지점에 있는 노구교 근처에서 한 일본군 부대가 야간훈련중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별안간 10여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전부대원에게 집합명령이 내려졌다. 병사 한 명이 행방불명이었다. 전부대는 일시에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 사실 그 병사는 용변중이었다. 그는 20분 뒤 대열로 복귀했다.
그러나 일본군 대대장은 중국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하며 주력을 현지로 급히 출동시켰다. 당시 노구교에는 송철원이 지휘하는 중국군이 주둔중이었다. 새벽 5시 반, 일본군은 공격을 개시하여 노구교를 점령해버렸다.
7월 11일 양측은 현지협정을 맺어 사태는 일단 해결된 듯했다. 그런데 7월 28일 일본군은 갑자기 북경과 천진을 총공격했다. 이로써 노구교 사건은 전면전으로 확대,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측에 가담, 승전국이 된 일본은 전후 빠른 성장을 했다. 그렇지만 방직공업과 군수산업에만 치우쳐 산업구조느 매우 불안정했다.
1929년 시작된 세계대공황으로 일본경제도 심한 타격을 받았다. 실업자가 급증하고 노동자, 농민의 생활이 몹시 빈궁해졌으며,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이 확산되었다. 그러자 이에 불안을 느낀 파시스트 세력이 고개를 들어 국가개조를 통해 위기를 타개하자는 운동을 폈다. 그 중심세력은 군부였다.
1932년 5월 15일, 파시스트 청년장교 일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른바 5,15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정당정치를 부정하고 군부, 관료의 주도하에 천황제 파시즘이란 일본 특유의 전체주의를 만들었다.
즉 독일의 히틀러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담당했던 절대자의 위치에 천황을 앉힌 것이다. 이들은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충성심으로 국민의 의식과 생활감정을 하나로 통일시켰다. 그리고 일본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아 공영권 건설'이란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들의 목표는 만주였다.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어 자원 및 군수물자 공급처로 삼기 위해서였다.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의 관동군은 봉천 근교의 유조구에서 자기네가 경영하는 만주철도를 몰래 파괴했다.
그리고는 이를 중국측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며 즉시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관동군은 순식간에 봉천을 점령하고 만주 일대를 손에 넣었다. 이것이 만주사변이다.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이 지역에 만주국이라는 허수아비 나라를 세웠다.
일본은 다음엔 화북지방으로 진출했다. 일본의 방적업 때문에 중국의 민족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국민들은 배일감정에 불타올라 있었다. 그런데 이때 국민당 정부의 총통 장개석은 공산당 토벌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2만 5천리 장정 끝에 섬서성으로 들어간 홍군의 뒤를 쫓아 토벌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1936년 12월 7일, 장개석은 전용기를 타고 섬서성 서안으로 날아갔다. 홍군과의 싸움에 소극적인 동북군 사령관 장학량을 다그치기 위해서였다. 장학량은 만주군벌 장작림의 아들로 장작림이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뒤부터 국민당과 손을 잡고 일본에 저항해왔다.
그의 부대는 홍군 토벌을 위해 서안에 주둔중이었으나 양군은 사실상 정전상태에 있었다. 왜냐하면 '중국인끼리 싸워선 안된다.' '빼앗긴 국토를 우리 힘으로 되찾자'는 홍군의 항일 통일전선 전술에 장학량군이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12일 새벽, 장학량의 부대가 장개석이 머물고 있는 온천장을 급습했다. 장개석은 잠옷 바람으로 달아났다. 뒷산 바위 틈에서 그를 찾아낸 수색대 지휘관은 정중하게 경례를 붙이며 말했다.
'저희는 각하를 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각하께서 조국을 이끌고 일본에 대항하길 바랄 뿐입니다. '
장학량은 장개석을 감금하고 8개항으로 된 구국의 요구를 제출, '내전 정지'와 '거국일치의 항일'을 요구했다. 이것이 유명한 서안 사건이다.
사건이 처지자 즉시 홍군의 군사위원회 부주석 주은래가 장학량의 비행기를 타고 서안으로 날아왔다. 주은래는 장개석이 황포군관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정치주임을 지냈었다. 주은래 또한 국공합작에 의한 거국적 항일운동을 요구했다. 장개석은 할 수 없이 이를 수락하고 남경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10년에 걸친 내전은 종식되고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홍군은 적기를 내리고 붉은 별을 떼었으며 장개석 휘하의 '제8로군'이 되었다. 그로부터 7개월 후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구실로 대대적인 중국침략을 감행했다. 수도 남경을 점령하고 무려 30만이 넘는 무고한 시민을 살륙한 '남경대학살'을 자행했다.
그리고 무한, 광동, 산서에 이르는 주요 도시들을 대부분 점령했다.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은 실로 잔혹했다. 중국인들은 이를 '삼광작전'이라 불렀다. 즉 죽이고, 태워버리고, 약탈한다는 뜻이다.
삼광작전으로 학살당한 중국인 수는 무려 1천 2백만 명을 헤아렸다. 한편 일본은 점령한 남경에 왕조명을 중심으로 하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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