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56. 황제 위에 올라탄 환관. 토목의 변(1449년) 

 

 

환관이란 우리 나라에서는 내시라고 하기도 하는데 주로 궁중의 일을 보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궁중에서 숙식 및 일상생활을 하기 때문에 생식기를 제거, 궁궐에서 성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도록했다.

 

중국에서 환관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특이하다. 특히 한족들의 지배 시기 환관들이 황제 가까이에서 권력을 마음대로 주물러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역사적으로 환관들이 정치에 관계하여 정치 질서를 문란시킨 것은 이미 춘추전국시대부터라고 한다. 진나라에 이르러서는 조고라는 환관이 있어 진시황이 죽은 후 유언을 위조하여 큰아들이 물려받아야 할 왕의 자리를 작은아들이 계승하게 했던 적도 있었다.


한나라에 들어오면 환관들이 아예 무리를 지어 하나의 당파로서 위세를 부리게 될 정도에 이른다. 후한대에 이르면 환관이 작당하여 황제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충성스럽고 강직한 기질을 지닌 선비들을 모함하여 몰살시키기에 이를 정도였다.


아주 비천한 신분의 심부름꾼에 불과한 환관들이 이렇게 엄청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 그들은 황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다. 심지어는 황제가 이들에게 중요한 정책의 결재, 혹은 명력을 대신 작성하게 하기도 한다. 따라서 환관에게 둘러싸인 황제는 그들의 손에 놀아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명나라 때의 환관이 정치적인 결정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은 매우 특이한 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의 최고관직인 내각 대학사가 정책 등에 대한 건의안을 올리면 황제는 이건의안에 대한 생각이나 승낙 혹은 반대의 뜻을 써서 내려주게 되었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그 일을 하는 것은 황제가 아니라 환관이었다. 글을 환관이 대필하는 것이다.

 

따라서 황제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가장 가까이서 그것을 지켜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환관이었다. 황제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게 될 수록 만일 환관이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다거나, 환관들이 황제를 둘러싸 인의 장막을 쳐 신하들의 접근을 막을 수만 있다면 황제의 절대적인 권력을 환관이 대신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니는 것이다.


이미 한나라와 당나라가 환관의 횡포로 말미암아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게 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명 태조는 이러한 과거 역사 경험을 거울삼아 환관들이 날뛰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그는 궁문에 "내신(환관)은 정사에 관여할 수 없다. 정치에 개입하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라고 새겼으며 환관의 숫자를 100명 이하로 했다. 또한 봉급도 아주 낮게 주었다.

 

이러한 환관에 대한 정책은 건문제 때도 계속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자가 '정난의 변' 때 영락제와 재통하여 영락제의 황제 즉위에 공을 세우기도 했다. 영락제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환관에 대한 대우를 약간 개선시켰다.

 

남경에서 떠나 북경에 도읍을 옮기면서 궁전을 넓히고 환관의 숫자를 수천 명으로 늘인 데 이어 위계질서에 따른 환관의 직책을 만들었다.


그중 최고위직이 사례감이었고, 공식문서에 황제 대신 대필하는 병필태감도 사례감에서 나왔다. 나중에는 궁중뿐만 아니라 지방장관 아래에 감찰관으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정보를 수집하는 밀정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영락제는 관료들보다는 환관을 더 신뢰하는 밀실정치로 그의 통치체제를 지탱했을 정도였다.


환관의 황포가 문제되기 시작한 것은 5대 황제인 영종 때부터다. 영종은 9세의 어린 나이로 황제에 올랐고 앞선 황제의 뜻에 따라 그의 할머니 태황태후 장시가 정치를 맡게 되었다.

 

장씨가 죽은 이후 영종은 황태자 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환관 왕진이라는 사람을 기용했다. 왕진은 환관의 최고직위인 사례감으로서 영종의 신임을 등에 엎고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영종은 왕진을 신임했고 그의 의견은 거의 반대하는 일이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왕진의 황포는 시간이 흐를수록 심해졌다. 궁전의 동쪽에 어마어마한 대저택을 지어 위세를 떨치는가 하면 임의로 외국에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명나라는 바야흐로 왕진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된 것이다. 자기에 대해 비판적인 관리는 팔다리를 잘라 죽이기도 했으며, 그에게 복종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관리나 학자는 어김 없이 쫓겨나거나 좌천되었다.


명나라가 이런 상황에 있을 때 항상 중국에 위협이 되는 몽고족의 세력파도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몽고의 일족인 오이라트가 세럭을 키워 명나라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촉발시킬 빌미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발단은 몽고가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치는 말이었다. 오이라트는 명나라에 말을 조공으로 바치고 있었는데 말에 대한 값을 지불하는 조공의 형태였다. 즉, 명은 오이라트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조공이라는 제도를 빌어 손해를 보면서 말을 사주었던 것이다.


1448년 오이라트는 조공사절단으로 2500명을 보낸다고 명에 통보했다. 이는 신제 파견하는 숫자보다 많은 숫자로서, 명에서도 이를 알면서도 묵인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당시 정권을 잡고 있었던 왕진은 실제로 온 숫자만큼만 상금을 내리고 그들이 가져와서 부른 말값도 1/5만 계산해주었다.

 

이것은 오이라트를 분노케 하는 일이었다. 마침내 오이라트는 대세력을 몰아 명을 침공했다. 왕진은 천자에게 친히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설 것을 요청했으며, 그 의견을 받아 영종은 군대를 이끌고 떠났다.

 

그러나 오이라트는 세력이 강성하여 겨뤄볼 생각을 못하고 철수하다 토목보에서 오이라트군의 포위를 받아 수만 명의 군사가 죽고 황제가 사로잡히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1449년). 이 싸움에서 왕진은 황제 호위장교에게 맞아죽었다. 이것을 토복보의 치욕이라고 하여 '토목의 변'이라 부른다.


토목의 변 이후 북경의 명 황실에서는 황급하게 영종의 아우를 황제로 올리고 방어책을 세웠다. 물론 이 토목의 변 이후 왕진은 죄상을 물어 그 족당을 모조리 죽이고 집 재산을 몰수했다.

 

이때 황진의 집에는 금과 은의 창고 60여 채 정도가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모든 보물은 그의 권력을 배경으로 관리들이나 백성들로부터 착취한 것이다.


왕진 이후로도 환관의 횡포는 그치지 않았다. 그중 대표적인 예만 들어도, 왕진이 죽은 10여년 뒤에 화노간인 조길상 등이 실권을 장악하여 세도를 부리다가 모반을 시도하여 실패 후 살해되는 일이 있었다. 16세기 초에는 환관 유근이 권력을 장악하여 반대파를 간악한 무리를 몰아 추방하고 정치를 마음대로 하다가 살해되었다. 


환관들로 인해 국가가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경우는 대개 한족의 국가들에서 볼 수 있고 유목민족으로 중국을 정복했던 정복민졸들에게는 환관의 횡포가 심각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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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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