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컴 1993년 7월호 - 컴퓨터 별곡
살아숨쉬는 롤프레잉의 걸작 「브리타니아 저택」
서양의 할로윈 만큼이나 유명하다는 '브리타니아 저택. 저 유명한 「울티마 시리즈의 리차드 게리어트가 만들었기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꼬인다고 한다. 로드 브리티시와 가디언, 그리고 배틀린이 나온다는 '브리타니아 저택'을 탐험해 본다.
최고의 모험물 '브리타니아 저택 1992"
10월 31일 밤. 이날은 아이들이 즐거운 장난을 치며, 이상하고 기묘한 옷을 입는다. 그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Trick or Treat!(먹을 것을 안주면 장난칠거야!)" 라고 외친다. 이 날이 바로 할로윈(Halloween)이라 불리우는 서양의 명절이다.
서양 사람들은 대부분 할로윈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들이 할로윈 만큼이나 좋아하는 또 다른 무엇이 있다. 유명한 롤플레잉 게임 「울티마 시리즈」 제작사인 오리진 시스템즈의 설립자 '로드 브리티시', 즉 리차드 게리어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브리타니아 저택 1992(Britannia Manor 1992)'는 게리어트 자신의 할로윈 사상 최고의 모험물인 것이다. 어릴적부터 도깨비집에 매료되었던 게리어트는 부모님께 온갖 변명을 다해서 동네 아이들을 위한 집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개조했다.
오리진이 뉴 햄프셔에 자리잡고 있을 동안 그는 '유령의 집(Spook Houses)'을 세 채나 발표했다. 그리고 텍사스주 오스틴으로의 회사 이전은 그의 상상력을 속박에서 풀어준 셈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난해하고 뒤엉킨 스토리들, 많은 캐릭터, 그리고 엄청난 특수 효과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할로윈은 이러한 거대하고 공들인, 함께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체험하기 위한 하나의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유령의 집'이 아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철저하게 인터액티브하고 실천적이며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완전한 경험이다"라고 게리어트 자신도 인정한다.
게리어트와 오리진은 유령의 집에 필요한 방수 용품, 목재, 화장품, 식료품, 도료, 의상, 심지어 아스피린 등의 소모품에 5만 5천 달러를 쏟아부었다. 하이 엔드 시스템 사는 10만 달러 상당의 콘서트 조명 및 레이저와 3만 달러 상당의 오디오 장비를 빌려 주었다.
게다가, 10만 달러의 카메라, 비디오 장비는 행사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커다란 도움이 되었으며 인근 주민들 역시 큰 힘이 되었다. 그 결과 입장객 당 2백~3백 달러에 달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나 게리어트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뮤지션들은 앨범의 판매량에 기인해 앨범이 얼마나 성공했는지 판단한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음악에 대한 반응을 알아 볼 기회는 없다. 그들이 라이브에 가치를 두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우는 바로 나의 경우이기도 하다. 지금 내가 계획하고 있는 일이야 말로 나의 창조물을 즐긴 사람들로 부터 얻을 수 있는 직접적이고, 순간적인 피드백인 것이다"고 게리어트는 덧 붙인다.
스릴만점의 경험 제공이 목적
'브리타니아 저택 1992'를 운영하는 것은 만들어 내는것 만큼이나 힘들었다. 이 작업에 참여한 자원 봉사자의 일의 양을 인시(人時 : 한 사람이 한 시간 동안 일했을 때의 일의 양)라는 수치로 나타내 보면 15,000이나 되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여러가지 선물을 받았는데, '내가 브리타이나 저택을 만들었다(I Created Britannia Manor)'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는 25시간 봉사한 사람들에게, 재커리 스코트 극장의 티켓은 50시간 봉사한 베테랑들에게, 그리고 1백 시간 이상을 봉사한 사람들에게는 세 곳의 오스틴 어드벤처 비디오 편집물이 증정되었다.
때때로 장비들이 일으키는 오동작에도 불구하고, 자원 봉사자들은 매일 밤 모험 세계가 자연스럽게 부활되도록 하였다. 20명의 운영자들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서로 긴밀히 연락을 하였고, 그리하여 내방객들의 경험에 방해를 주지 않고 고장을 처리할 수 있었을 뿐아니라, 응급 상황에도 대처 할 수 있었다.
그 덕택에 놀랍게도 2~3천 달러 상당의 손상만이 생겼을 뿐이었다. 자원 봉사자들은 제작 작업 중 매우 주의깊게 처리하고 돌보아서 그 건물이 전에 있던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모험에 앞서 육체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에서의 테스트가 시행되게 된다." 게리어트는 참여하는 관객들에게 경고한다.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살아서 돌아오기는 하겠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전과 같은 온전한 상태로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몇몇 그룹들은 물을 뒤집어 쓰기까지 하고, 심지어 몇몇은 돌아가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금요일 저녁 코스 중 관객들이 노를 저어 해자(垓字: 성 밖으로 둘러서 판 못)를 돌아나가고 있을 때, 보트가 새기 시작해 천천히 가라 앉았다. 나머지 다섯 그룹은 모험을 계속하기 위해 근처의 작은 섬으로 헤엄쳐 가야만 했다.
부득이 입장 허가를 받지 못한 손님들이야 말로 정말로 실망한 사람들이다. 일찍 도착한 사람들은 게리어트의 개인 도로에서 티켓을 얻기 위해 노숙을 할 정도였다. 판매 시작 첫 날 밤에 표는 이미 매진되었다. 단지 1천명 만이 모험을 즐길 수 있었고, 1만 5천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은 내년을 기약해야만 했다.
입장객들은 4분 30초 마다 4명씩 조를 이루어서 입장했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하는지 보고자 하는게 아니다. 표를 구하기 위해 장사진을 이루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얼마나 신나는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목적일다" 라고 게이어트는 설명한다.
이글은 지금은 없어진 컴퓨터 잡지, 마이컴 1993년 7월호 기사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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